"패피" 보잉턴, 검은양떼 전투기대의 지휘관 태평양전쟁

패피 보잉턴
Pappy Boyington



(영문 위키피디아를 번역했습니다.)

"패피" 보잉턴

그레고리 "패피" 보잉턴은 미국 해병장교로 복무했다. 제2차세계대전에 참전한 전투기 조종사다. 영웅적 행동으로 명예훈장과 해병십자훈장을 받았다. 보잉턴은 먼저 중일전쟁 기간에 중화민국공군 소속 미국의용항공대의 일원으로 비행했다. 그뒤 2차대전 동안 유명한 214 해병 전투기대 즉 검은양떼 비행대를 지휘했다. 나중에 전쟁 포로가 됐다.

젊은 시절

그레고리 보잉턴은 1912 년12 월 4 일 미합중국 아이다호 주 쿠르덜레느에서 태어났다.(쿠르덜레느는 미국 인디언 부족의 이름이다. 그가 인디언 혼혈이란 주장도 있고 심지어 흑인 혼혈이란 주장도 있다. 그러나 현재 쿠르덜레느 주민은 90 퍼센트 이상이 백인이고 보잉턴 스스로도 인디언 설을 때때로 부인했다고 한다 -- 옮긴이) 아이다호 주 세인트매리스의 벌목촌과 워싱턴 주  타코마에서 자라났고 링컨 고등학교의 레슬링 선수였다. 첫 비행을 6살이 되던 해에 그뒤 태평양을 무착륙으로 비행한 클라이드 팽본과 함께했다.

1930년 워싱턴 대학교에 입학해 ROTC 가 되었으며 람다카이알파 사교 클럽에 입회했다. 대학 레슬링부 및 수영팀의 일원으로서 태평양연안 북서부대학간 미들급 레슬링 타이틀을 획득했다. 1934 년 항공공학 학사 로 졸업했다. 고향에 있던 탄광 캠프와 벌목 캠프에서 일하며 여름을 보내고 도로 공사 현장에서 쿠르덜레느 화재 예방 협회의 경비업무를 봤다. 보잉턴은 졸업하자마자 결혼하고 보잉 사에서 제도사와 기술자로 근무했다.

새 아버지를 따라 할렌벡이란 이름으로 자랐으나 비행 훈련을 신청하면서 출생 증명을 확인하니 친부는 찰스 보잉턴이었고 젖먹이일 때 이혼한 것을 알았다. 그레고리 보잉턴이란 이름은 아직 공식 결혼 기록이 없었기 때문에 아무 문제 없이 미국 해병의 조종사 생도가 될 수 있었다.

군 경력

보잉턴은 대학에서 ROTC의 일원으로 사관 후보생이 되며 군 경력을 시작했다. 1934 년 6 월 해안 포병 예비대의 소위로 임관돼 위싱턴 주 포트워던의 630 해안 포병대에서 2달을 복무했다. 1935 년 6 월 13 일 해병 자원입대 예비대에 들어가 복무했다. 같은 해 7월 16일 근무가 해제됐다. 1936 년 보잉턴은 해병대 예비대의 조종사 생도가 됐다. 플로리다 주 펜사콜라 해군 항공 기지에 배속돼 비행훈련을 받았다. 1937 년 3 월 11 일 버지니아 주 콴티코 기지로 전근돼 함대 해병부대 에어크래프트원에서 근무했다. 1937 년 7 월 1 일 해병대 예비대에서 해제돼 다음날 해병 현역 소위로 임관됐다. 1938 년 7 월 필라델피아의 기초학교로 보내졌다. 과정을 수료하고 샌디에고 해군기지의 2해병항공전단으로 전출됐다. 항공모함 USS렉싱턴과 USS요크타운에서 함대문제훈련(Fleet Problems, 1923-1940, 미해군의 대규모 훈련시리즈)에 참여했다. 1940 년 11 월 4 일 중위로 진급해 보잉턴은 다음달 교관으로서 펜사콜라로 돌아갔다.

보잉턴은 1941 년 8 월 26 일 해병대를 제대해 중앙 항공 제조사(CAMCO)에 취직했다. 이름과 달리 CAMCO는 중국과 버마 공로를 지키려는 특별 항공대의 요원을 모집하는 계약을 맺은 민간 기구였다. 이 항공대는 미국 의용 항공대(AVG) 로 알려진 유명한 중국의 플라잉 타이거즈다. 타이거즈에서 몇달 복무하면서 보잉턴은 편대장이 되었다. 그는 이 부대 지휘관 클레어 셰놀트와 자주 부딪혔다. AVG 1 편대의 일원으로 보잉턴은 일본 항공기 3.5 기를 공중 및 지상에서 격파한 것이 공식 인정됐지만 AVG 기록에 따르면 추가적 1기 격추도 그가 한 듯하다. 그는 나중에 타이거즈 시절 6 기를 격파했다고 주장했지만 이런 숫자에 대한 증거가 없다. 1942 년 봄 미국 의용 항공대와 계약을 깨고 미국으로 돌아가 결국 해병대에 재입대했다. 경험있는 전투 조종사가 절실했던 해병대에서 보잉턴은 소령 계급을 요구했다.

1 해병 항공단 11 항공 전대에 소속돼 과달카날 섬에서 작전하는 121 해병 전투기대의 선임 참모가 됐다. 121 전대에서 근무하면서 보잉턴은 적기를 1 기도 격추하지 못했다. 그뒤 검은양떼 비행대란 별명으로 알려진 214 해병 전투기대의 지휘관이 됐다. 지휘관 시절의 별명이 할배였다. 31세의 나이 는 대부분의 부하보다 열 살은 많았기 때문이다. 이런 별명은 군대에서 흔했는데 특히 부대 지휘관은 종종 노인으로 불렸다. 휘펜푸프 송의 가사를 부하 조종사 폴 문 뮬렌이 고쳐 부르면서 별명이 패피(아빠)가 되었으며 이렇게 고쳐 부른 노래가 종군기자들에게 알려졌다.

보잉턴은 214 전대에서 보우트 F4U 코르세어기를 조종하며 세운 공훈으로 가장 유명하다. 러셀 제도-뉴조지아 섬 지역과 부갠빌 섬-뉴브리튼 섬-뉴 섬 지역에서 활약하면서 보잉턴은 거의 매일 기록을 더했다. 비행대의 첫 전투 임무 기간에 소령은 32 일 간 14 기의 적기 를 격추했다. 12 월 27 일 기록이 25 기까지 올라갔다.


214해병전투기대의 F4U 코르세어 


널리 알려진 대담한 위업은 1943 년 10 월 17 일 부갠빌 끝에 위치한 카힐리 비행장 공격이었다. 그와 24 기의 전투기는 적기 60 기가 주둔한 비행장을 돌며 대규모 편대를 보내도록 적군을 자극했다. 치열한 전투에서 적기 20 기를 검은 양떼가 격추하고 아무 손실 없이 귀환했다. 벨라라벨라 섬에 주둔한 보잉턴 비행대는 월드 시리즈의 메이저리그 선수들이 그들에게 보내는 야구 모자의 숫자만큼 일본 제로 기를 격추하겠다고 제안했다. 모자 20 개를 받았지만 적기를 더 많이 격추했다.


A6M5 제로

1944 년 1 월 3 일 라바울 항 상공에서 그는 26 기로 미군 기록 타이를 달성했지만 같은 날 자신이 격추됐다. 검은양떼 비행대 소속의 4 기로 이뤄진 1 개 분대를 포함한 미 전투기 48 기는 부갠빌에서 이륙해 라바울 상공에서 전투기 소탕에 나섰다. 보잉턴은 비행 편대의 전술 지휘관으로 아침 8 시에 목표 상공에 도착했다. 이어진 작전에서 소령은 26 번째 격추를 기록했다. 그런 뒤 급강하며 덮치는 비행기들 속에 뒤섞여 전투 중에 보이지도 않고 무선 교신도 없었으며 편대와 함께 귀환하지도 않았다. 훗날 카와토  마사지로가 스스로 보잉턴의 전투기를 격추한 조종사라고 주장했다. 2 권의 책과 많은 공식 행사(종종 보잉턴과 함께)에서 그 전투를 묘사했고 죽을 때까지 고집했지만 그 주장은 결국 증명되지 못했다. 보잉턴이 격추 당한 전투에서 약 30 기의 미 전투기와 교전한 70 기의 일 전투기 가운데 카와토가 있었는지 기록이 문제가 된다. 보잉턴의 윙맨 조지 애쉬먼 대위는 전사했다.

뒤이은 철저하지만 헛된 수색 끝에 보잉턴은 전투중 행방불명으로 선언됐다. 그는 일본 잠수함에 구조돼 전쟁 포로가 됐다. 이 잠수함은 그를 구조하고 13 일 뒤 침몰했다. 보잉턴의 자서전에 따르면 그는 일본에 의해 한번도 공식 전쟁포로로 인정되지 않았으며 그를 잡은 것은 적십자에 보고되지 않았다. 그는 전쟁의 남은 기간 약 20 개월을 일본의 포로 수용소에서 보냈다. 라바울 과 트럭 섬에서 잠시 붙잡혀 있으면서 헤일스톤 작전으로 알려진 미해군의 대규모 공격에서 살아남은 뒤 일단 오푸나 포로 수용소로 옮겨졌다가 결국 토오쿄오 근처의 오오모리 포로 수용소로 이송됐다. 이 시기에 잠정적으로 중령 진급대상으로 뽑혔다. 동료 미군 포로는 명예훈장을 받은 잠수함장 리차드 오케인이었다.

1945 년 8 월 중순 원자폭탄 투하와 일본의 무조건항복 뒤에 보잉턴은 토오쿄오 근처의 오오모리 포로수용소에서 8 월 29 일 풀려났다. 1945 년 9 월 12 일 미국 앨러미더 해군 항공기지로 돌아가 214 전대의 옛 대원들과 만났다. 그날밤 샌프란시스코 시내의 세인트프랜시스 호텔에서 그를 위해 파티가 열린 것을 라이프 지에서 보도했다. 이 잡지에서 술을 마시는 사람들을 보여준 것은 이 파티를 다룬 기사가 사상처음이었다. 도착에 앞서 9 월 6 일 그 동안 잠정적이었던 해병 중령 계급장을 받았다.

미국으로 돌아온 직후 보잉턴 중령은 미국 최고 명예인 명예훈장 을 미국 의회에서 받기 위해 워싱턴으로 불려갔다. 이 훈장은 전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1944 년 3 월 수여하려 했지만 그가 받을 수 있을 때까지 연기된 것이다. 1944 년 10 월 4 일 보잉턴은 라바울 공습을 기려 해병 사령관으로부터 해군 십자훈장을 받았다. 다음날 니미츠 데이에 그와 다른 수병과 해병들이 백악관에서 해리 트루먼 대통령으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명예훈장을 받은 보잉턴


명예훈장과 십자훈장을 받은 뒤 보잉턴은 일종의 승전축하 순회행사에 나섰다. 원래는 콴티코 기지의 해병 학교에 보고하도록 명령받았지만 나중에 캘리포니아 주 샌디에이고 미라마르에 위치한 서부해안 해병항공창의 사령관에게 보고하도록 지시받았다. 1947 년 8 월 1 일 해병대를 제대했는데 특별히 실제 전투에서 임무를 수행했기 때문에 대령으로 진급해 제대했다.

제대 후

보잉턴은 거칠고 방탕한 성격의 특이한 사람으로 알려졌다. 또한 폭음을 일삼아 전쟁 뒤 몇년 사이에 술이 그를 괴롭히고 여러 번 이혼한 것도 부분적으로 음주 탓이었다. 포로 수용소에서 2 년을 보내면서 술을 강제로 끊은 덕분에 건강이 좋아졌다고 스스로 거리낌 없이 인정했다. 여러가지 민간 직업을 가졌는데 프로 레슬링의 심판과 선수로 뛴 적도 있다.

많은 이들은 1970 년대 텔레비젼쇼 음매음매 검은 양떼( Baa Baa Black Sheep: 검은양떼 비행대로도 알려졌다. )를 통해 그를 알았다. 이것은 보잉턴이 쓴 같은 이름의 자서전에 매우 느슨하게 기반한 것으로 로버트 콘라드가 보잉턴을 연기했다. 영화 라이트 스터프의 척 예거처럼 패피 보잉턴도 이 쇼의 시즌2에서 기지를 방문하는 장군으로 잠깐 출연했다. 보잉턴의 많은 부대원은 이 쇼에 매우 격분했는데 대부분이 픽션이고 보잉턴을 지나치게 미화했다고 주장했다. 최소한 이 텔레비젼쇼에서 보잉턴이 미트볼이란 이름의 불테리어개를 가진 것으로 그려졌다. 그러나 1970 년대 실험비행 협회의 에어쇼 도서 사인회에서 만약 그가 그 당시 개를 가졌다면 그렇게 못 생긴 개는 아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보잉턴은 자주 인터뷰어들과 청중에게 그 텔레비젼 시리즈는 픽션이며 실제 역사와는 약간 관련이 있을 뿐이라며 그것을 말도 안 되는 헐리우드 싸구려 영화라고 말했다. 자서전뿐 아니라 보잉턴은 AVG(미국 의용 항공대 플라잉 타이거즈)를 다룬 소설도 썼다. 토냐는 스파이 이야기인데 등장 인물들은 실존 인물을 떠올리게 한다. 종종 그들 이름의 음절을 바꿔치기했다(예를 들어 디크 로시를 로스 디키로).

예술 작품이나 출판 사진에서 종종 보잉턴은 숫자 86이 새겨지고 격추 깃발로 뒤덮인 룰루벨이란 비행기와 함께 있는데 이것은 그의 전투기가 아니었다. 사실 그는 같은 비행기를 몇번 이상 탄 적이 거의 없다. 그는 겉보기에 가장 엉망이어서 아무도 타기 싫어하는 F4U를 골랐다고 전해진다. 기체번호 86 의 F4U 코르세어기에 보잉턴이 탑승한 출판 사진은 1943 년 11 월 26 일 뉴헤브라이드 제도의 에스피리투산토에서 촬영했다. 이 사진은 보잉턴이 지휘관으로서 214 전대의 첫번째와 두번째 작전을 치르던 사이에 214 전대가 휴가를 보낼 때 찍었다. 종전 후 보잉턴이 출판 사진의 기체이름이 룰루벨이라고 주장했지만 브루스 갬블의 분석에 따르면 아무래도 루시벨 같다. 214 전대는 보잉턴이 지휘하기 전에 솔로몬 제도에서 두 번의 작전에 투입됐다.

그는 스미스소니언 협회 국립항공우주박물관의 폴가버 보존복구보관소를 방문했는데 우연히 박물관의 F4U 코르세어 기가 복구 공장에서 막 나가는 참이었다. 박물관 안내원의 목격에 따르면 보잉턴이 옛날 생각이 나서 콕피트에 올라타더니 엔진 시동을 걸려 했다. 보잉턴은 그 코르세어의 랜딩 기어 수납부에 매직마커를 써서 서명을 남겼다. 그리고 사실상 자기가 본 코르세어 중에 최상의 컨디션이라고 말했다. 몇년 뒤 그 동일한 코르세어가 스미스소니언 항공우주박물관의 덜레스 별관의 천정에 매달렸는데 시력이 좋은 이들이라면 보잉턴의 서명을 바닥에서 올려다 볼 수 있다.

1957 년 텔레비젼 패널쇼 진실고백에 게스트 도전자로 출연했다. 보잉턴은 첫번째 아내가 낳은 세 자녀의 부재하는 아버지였다. 딸 쟈네트 보잉턴은 자살했다. 아들 그레고리 보잉턴 2세는 1960년 미국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중령 계급으로 공군에서 예편했다.

죽음


오랫동안 골초였던 보잉턴은 1988 년 1 월 11 일 캘리포니아 주 프레스노에서 75 세에 암으로 사망했다. 1988 년 1 월 15 일 명예훈장 포상자로 예식 7A-150에 따라 앤드류 공군기지 해병파견대의 F4 팬텀기들의 추모 비행을 포함한 최고의 예를 다해서 앨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프레스노 에서 이륙해 운구하기 앞서서 VMA-214 (검은양떼 전투기대를 계승한 부대) 편대가 비행했다. 애초에 그들도 추모 비행을 시도했으나 4 기 중 1 기가 기계고장을 일으켰다. 장례식이 끝난 뒤 보잉턴의 친구 프레드 로쉬가 묘비를 내려다 보니 보잉턴이 복싱의 전설 조 루이스 옆이어서 "보잉턴이 또 한바탕 싸우러 가면 안 될텐데...”라고 말했다.

수상과 명예

해군비행사휘장 명예훈장 해군십자훈장 미국종군훈장 아시아태평양작전2성훈장 2차대전승전훈장

명예훈장

“의회의 이름으로 미합중국대통령이 아래와 같이 군무를 수행한 보잉턴 미합중국 해병예비대소령에게 기쁜 마음으로 명예훈장을 수여합니다:

1943년 9 월 12 일부터 1944 년 1 월 3 일까지 중앙 솔로몬 지역에서 일본군에 맞서 24 해병 전투비행대의 지휘관으로 주어진 의무를 뛰어넘는 비범한 영웅적 행위를 하였습니다. 중무장한 적군의 상공에서 잇따른 위험한 비행을 통해 늘 수적으로 열세인 상황에서 보잉턴 소령은 언제나 대담하고 용감하게 적군을 공격하며 그의 편대를 전투에 이끌어 일본군의 선박, 해안기지, 항공전력에 궤멸적 타격을 가했습니다. 적군에게 심각한 손상을 가하려는 확고한 의지로 보잉턴 소령은 10 월 17 일 카힐리 상공에서 24기의 편대를 이끌고 적기 60 기가 주기해 있는 이 비행장을 계속 선회하며 일본군이 항공기를 출격시키도록 대담하게 도전했습니다. 그의 눈부신 지휘 하에 아군 전투기는 1기의 손실도 없이 이어지는 교전에서 적기 20 기를 격추했습니다.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최상의 조종사이자 단호한 전사 보잉턴 소령은 개인 통산 일본 항공기 26기를 파괴했으며 강력한 지도력으로 전투 태세를 갖추어 이 전략적으로 몹시 중요한 지역에서 연합군이 공중전과를 얻는 데 그의 지휘가 탁월한 요소였습니다.”

비행장 명칭 변경

2007 년 8 월 아이다호 주 쿠르델레느 공항이 보잉턴을 기려 쿠르델레느 공항-패피 보잉턴 비행장으로 개명됐다. 영화 제작자 케빈 곤잘레스가 2008 년 제작한 독립다큐멘터리영화 패피 보잉턴 비행장을 제작해 그를 기념하는 이름을 더하기 위해 캠페인을 벌인 민초들을 연대기적으로 기록했다. 이 영화는 이 캠페인에 관여한 이 지역의 참전 용사들을 보여줄 뿐 아니라 아들 그레고리 보잉턴 2세와 텔레비젼 시리즈에서 그를 연기한 로버트 콘라드를 통해 보잉턴의 개인적 삶을 들여다보았다. 이 다큐멘터리 영화는 해병대의 감수를 받았다. 
  
워싱턴 대학교 명예훈장 기념비

2006 년 2 월 보잉턴의 2차대전 군복무를 기리기 위해 기념비 건립을 권고하는 결의안이 워싱턴 대학교 학생회의 연합 학생 미팅에서 상정됐다가 무산됐다. 어떤 이들은 이 결의안의 스폰서가 기념비 건립의 재정과 물류 상의 문제를 충분히 알렸다고 믿지 않았으며 어떤 이들은 전쟁의 모든 전사와 교전행위가 자동적으로 기념될 만한 가치가 있다는 널리 신봉되는 가정에 의문을 제기했다.

이 이야기가 일부 블러그와 보수 언론매체에 실리며 학생회 모임에서 나온 두 가지 발언이 집중 부각됐다. 학생회 간부 애슐리 밀러는 워싱턴 대학교 내에 이미 부유한 백인들(보잉턴은 인디언 수족 혈통이고 부유하지 않았다)의 많은 기념물이 있음을 지적했다. 또다른 학생 질 에드워드는 워싱턴 대학교가 다른 사람들을 죽인 이를 기념해야 하는지 물었는데 요약하자면 그녀는 그 해병대원을 워싱턴 대학교가 배출해야 할 유형의 사람으로 믿지 않았다.

결의안의 부결 뒤 원래 결의안을 변경해 워싱턴 대학교를 다닌 뒤 명예훈장을 받은 다른 5명의 워싱턴 대학교 동문 모두를 포함해 기념하는 새로운 안이 제출됐다. 2006 년 4 월 4 일 호명 투표를 통해 기권 몇 표를 포함해 64 대14로 통과됐다. 최종적인 워싱턴대학교 명예훈장 기념비는 2009 년 재향군인의날에 완성됐는데 사립재단이 지원했다. 이 기념비는 보잉턴뿐 아니라 데밍 브론슨, 브루스 크랜덜, 존 D. 호크, 로버트 레이시, 윌리엄 켄조 나카무라, 아치 반윙클 을 기렸다.

덧글

  • JOSH 2012/07/17 13:37 # 답글

    포로수용소의 긍정적인 효과....... ㅋ
  • 뽀도르 2012/07/18 09:42 #

    ㅋㅋ 저것만은 전화위복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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