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전쟁] 레이테 해전, 사상최대의 해상전투 (2/2) 태평양전쟁

(레이테해전 2/2)

사마르해전


서막

할시가 3함대의 가용전력을 북쪽으로 모두 동원해 일본북방군을 공격하기로 결정하자 산베르나르디노 해협이 완전히 무방비상태였다.  7함대에서 킨케이드와 참모들을 포함한 고위장교 대부분은 할시가 그의 3 개의 가용한 항공모함전단을 북쪽으로 ( 3함대에서 최강인 맥퀘인의 항공모함전단은 아직도 울리씨 방향에서 돌아오고 있었다) 보냈지만 34기동부대의 전함들은 일본중앙군에 맞서 산베르나르디노해협을 지키도록  남겨두었다고 여겼다. 실제는 할시가 아직도 34기동부대를 편성치 않았고 윌리스 리의 전함 6 척 모두 항공모함들과 함께 3함대의 모든 순양함과 구축함까지 포함해 북진하고 있었다.


쿠리타의 중앙군은 그러므로 10월 25일 03시 00분 산베르나르디노해협에서 아무 저항도 받지 않고 출현해 사마르섬의 해변을 따라 남진했다.  그 경로에는 오직 7함대의 3개 호위항공모함전대( 콜사인: 태피 1, 2, 3 )가 모두 16 척의 작고 매우 느리고 무장하지 않은 호위항공모함들을 가지고 경무장하거나 무장이 없는 구축함과 더 작은 호위구축함( destroyer escorts, DEs )의 장막으로 보호받았다. 팔라완수로와 시부얀 해 작전의 손실에도 일본중앙군은 여전히 매우 강력해 전함 4 척( 거대한 야마토도 포함 ), 중순양함 6 척, 경순양함 2 척, 구축함 11 척으로 편성됐다.   

전투


쿠리타군은 클리프턴 스프레이그 소장의 77.4.3 기동전대 ( 태피 3 )를 완전히 기습했다. 스프레이그가 항공기출격을 호위항공모함들에 지시하고 동쪽으로 레인스콜( 비를 동반한 돌풍 ) 속으로 달아났다. 그는 구축함과 호위구축함들이 연막을 쳐서 후퇴하는 항공모함들을  숨기도록 명했다. 쿠리타는 오자와의 미끼계획이 성공한 줄 모르고 할시의 3함대소속 항공모함전단을 발견했다고 여겼다. 그의 함대를 대공대형으로 재배치하면서 쿠리타는 총공격을 명령해 사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그는 함대를 여러 분대로 나눠서 독자적으로 공격하게 했다[5].    

구축함 USS존스턴은 적함대에 가장 가까웠다. 누구의 명령도 받지 않고 어니스트 E. 에반스 해군소령은 자신의 더없이 구식인 구축함을 전속력으로 움직여 적진으로 돌격했다. 이것을 보고 스프레이그 는 <<꼬마들 총공격>>을 명하며 태피 3의 나머지 호위함을 한바탕 싸움 속으로 집어넣었다. 태피 3의 다른 2 척의 구축함, 호엘 과 히어맨, 호위구축함 사무엘 B. 로버츠는 결사적 투지로 공격하며 사격을 퍼붓고 어뢰공격으로 일본함대의 대형을 흐트렸다.    

그동안 토마스 스프레이그( 클리프턴과 관련 없음 )는 자신의 3개 기동전대 소속의 16개 항공모함에 명령해 항공기에 무기를 닥치는 대로 심지어 기관총이나 폭뢰라도 장착해서 출격시켰다. 그에게 주어진 항공기가 450 기 가량 있었는데, 대부분 FM-2 와일드캣전투기와 TBM 어벤저뇌격기였다. 공중반격이 끊임없다시피 했는데 특히 펠릭스 스텀프의 77.4.2 기동전대( 태피 2 )에서 출격한 몇 개의 공격대가 그나마 중무장이었다.   

태피 3의 항공모함들은 남쪽으로 돌아 포화 속에서 후퇴했다. 미군대형의 후미에 있던 갬비어베이가 침몰하고 다른 항공모함 대부분도 손상됐다.

쿠리타 제독의 후퇴

격렬한 방어를 보고 일본군은 그들이 가망없는 호위항공모함과 구축함들이 아니라 주력함대와 교전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총공격>> 명령의 혼란은 공중폭격 및 어뢰공격으로 더욱 복잡해졌는데 쿠리타의 기함 야마토가 어뢰를 피하느라 북쪽으로 선회한 탓에 전투 중 접촉이 끊겼다. 쿠리타는 갑자기 전투를 중지하고 <<전 함대는 나를 따라 북쪽으로 속도 20>>이라고 명령했는데 틀림없이 흐트러진 함대를 재조직하려는 것이었다. 다시 레이테만으로 돌아서면서 쿠리타는 전투보고에서 미 항공모함전단이 그의 북쪽으로 항해한다는 보고를 받았다고 적었다.

수송함보다는 주력군함에 맞서 함대를 총동원하는 것을 선호해 쿠리타가 추격에 나서는 바람에 레이테만의 수송선단을 격파할 기회를 놓쳤다. 있지도 않는 항공모함들을 요격하는 데 실패한 뒤 쿠리타는 결국 산베르나르디노해협으로 후퇴했다. 중순양함 가운데 3 척이 가라앉고 완강한 저항 때문에 공격을 계속하면 일본의 손실을 늘릴 뿐이라고 확신했다. 오자와가 할시를 레이테만 멀리 유인한 것을 모른 것도 쿠리타에게 영향을 줬다.  

여전히 쿠리타는 3함대와 교전하고 있다고 확신해 할시가 그를 포위해 섬멸하는 것은 시간 문제일 뿐이라고 생각했다[5]. 클리프턴 스프레이그 소장은 그의 동료 오브레이 피치에게 전후에 <<나는 … 그들이 북쪽으로 돌린 것은 너무 많은 손상을 계속 받아서라고 [니미츠 에게] 썼으며 지금도 그런 생각이며 냉정한 분석으로 확증할 수 있다고 생각하네.>>라고 적었다[9].  

쿠리타군의 생존병력이 대부분 탈출에 성공했다. 할시와 3함대의 전함들은 너무 늦게 와 쿠리타를 차단하지 못했다. 나가토 와 하루나, 콩고는 태피 3의 항공모함들의 항공공격으로 어느 정도 손상을 입었다.  쿠리타는 전함 5척으로 전투를 시작했지만 기지로 돌아갈 때 야마토만 전투능력을 유지했다.

이런 자포자기식 수상작전이 끝나가자 오니시 타키지로 부제독은 특별공격대를 작전에 투입해 카미카제특공대를 레이테만의 연합군 선박과 사마르섬 앞바다의 호위항공모함들에게 출격시켰다. 태피 3의 호위항공모함 세인트로에 카미카제공격기가 명중해 내부폭발이 줄이은 뒤 침몰했다[4][9].



카미카제 공격을 받은 뒤 폭발하는 세인트로 호


엔가뇨곶전투

오자와의 북방군은 4 척의 항공모함( 주이카쿠-1941년 진주만 공격에 나섰던 항공모함 6척에서 마지막 생존함, 경항공모함 주이호, 치토세, 치요다),  1차대전의 전함 2척( 휴가, 이세: 선체 일부를 항공모함로 개조, 고물쪽 포탑을 격납고, 항공기 운용데크, 캐타펄트로 대체했지만, 아무 전함도 이 전투에서 항공기를 탑재하지 않았다) , 경순함 3척(오요다, 타마, 이스즈),  구축함 9척으로 이뤄졌다. 항공기는 겨우 108 기였다.
 


엔가뇨 곶 전투에서 미 해군 급강하폭격기의 공격을 받는 일 해군 주이카쿠 호(왼쪽)와 (아마도) 주이호오 호


오자와군은 10월 24일 16시 00분까지 발견되지 않았는데 할시의 휘하 가운데 가장 북쪽에 있던 셔먼의 38.3기동전단이 이 지역의 수색을 맡은 탓이 크다. 할시가 북쪽으로 끌고 간 전력은 미쳐의 38기동부대로 일본북방군을 압도했다.  그 가운데 3개 항공모함전단은 대형함대항공모함 5척( 인트레피드, 프랭클린, 렉싱턴, 엔터프라이즈, 에섹스), 경함대항공모함 5척( 인디펜던스, 벨로우드, 랭글리, 카보트,  샌자신토 ), 전함 6척( 알라바마, 아이오와, 매사츄세츠, 뉴저지 , 사우스다코다, 와싱턴 ), 순양함 8척( 중 2척, 경 6척 ), 구축함 40척 이상이었다. 미 항공모함 10척의 항공전단은 다 합쳐서 600 에서 1000 기의 항공기를 보유했다[4].

10월 25일 02시 40분 할시는 34기동부대를 분리해 3함대의 전함 6척으로 편성하고 윌리스 A. 리에게 지휘를 맡겼다. 먼동이 터오자 34기동부대의 배들은 항공모함전단의 선두로 나아갔다. 할시의 의도는 미쳐 제독이 앞서 공습하고 뒤따라 의 전함들이 격렬하게 포격하는 것이었다[4].     

10월 25일 새벽 무렵 오자와는 3함대를 공습하고자 75 기를 출격시켰다. 대부분 초계비행 중이던 미군기가 격추해 미함대에 아무 피해가 없었다. 몇몇 일본기가 살아남아 루손의 육상 기지로 달아났다. 밤새 할시는 38기동부대의 미쳐에게 전술명령을 보내 미항공모함전단들은 새벽에 아직 북방군의 위치를 확인하기 전에 180 기의 제1파 공격대를 출격시켰다. 07시 10분 정찰기가 발견할 당시 북방군은 38기동부대 앞을  선회하고 있었다. 08시 00분 공격을 개시해 호위전투기들이 오자와의 초계기 약 30기를 격파했다. 미군의 공습이 저녁까지 이어져 38기동부대는 북방군에 527회 출격해 주이카쿠 와 경함모 치토세, 주이호, 구축함 아키즈키를 막대한 인명피해와 함께 침몰시켰다. 경함모 치요다 와  순양함 타마는 무력화됐다. 오자와는 지휘를 경순양함 오요도에 넘겼다.



주이카쿠 호의 승무원들이, 배가 기울어 일본제국해군의 기함 역할이 끝나가자, 경례하고 있다.


위기 - 미 7함대의 구원 요청

10월 25일 08시 00분 직후 그때까지 수리가오해협에서 니시무라의 남방군과 교전하던 제7함대로부터 구원을 요청하는 다급한 메시지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킨케이드의 메시지 하나는 평이한 문장으로 이렇게 보내졌다.

<<여기 상황이 심각합니다. 고속전함과 공중지원이 있어야 적군이 CVE( 호위항공모함 )들을 파괴하고 레이테로 진입하는 것을 막겠습니다.>>

할시는 이 메시지에 충격을 받았다고 기억을 되살리며 7함대의 무전신호가 통신실의 업무폭증 때문에 무작위하고 무질서하게 들어왔다고 회고했다. 10시 00분까지 할시는 킨케이드의 다급한 메시지를 받지 못한 것 같다. 할시는 나중에 그가 킨케이드가 곤경에 빠진 것을 알았다고 주장했지만 얼마나 심각한 위기인지 깨닫지 못했다.  

킨케이드의 신호 가운데 가장 다급한 것은 수리가오해협에서 작전한 뒤 7함대 전함들이 탄약이 바닥날 지경이라고 보고한 것이다. 이런 것조차 ‘강력한’ 7함대에 어떠한 긴급지원이라도 보내도록 할시를 납득시키지 못했다[2][3][4]. 사실은 7함대 전함들이 킨케이드의 보고처럼 탄약이 부족한 것은 아니었지만 할시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4,800 km 떨어진 진주만에서 니미츠는 태피3의 절망적 호출을 모니터하고 있었다. 그가 할시에게 보낸 간결한 메시지는 <<TURKEY TROTS TO WATER GG FROM CINCPAC ACTION COM THIRD FLEET INFO COMINCH CTF SEVENTY-SEVEN X WHERE IS RPT WHERE IS TASK FORCE THIRTY FOUR RR THE WORLD WONDERS.>>였다. 앞의 네 단어와 뒤의 세 단어는 “군더더기”로 적군의 암호해독을 혼란시키는 데 쓰였다. 진짜 메시지는 처음과 끝을 두개의 자음 ( 여기서는 “GG”와 “RR” )로 표시했다. 할시의 기함에서 통신스탭은 군더더기의 첫번째 부분을 올바로 삭제했지만 끝의 세 단어는 실수로 자르지 않은 채 마지막으로 할시에게 건네줬다.

끝의 세 단어는 - 아마도 니미츠사령부의 통신장교가 골랐겠지만 - 테니슨의 시 경기병대의돌격에서 인용한 듯한데 왜냐하면 우연히도 이날 10월 25일은 발라클라바전투( 영국과 러시아의 크림전쟁에서 영국경기병대의 돌격으로 영국 역사상 가장 졸렬한 전투로 기록됨 )의 90주년 기념일이었다. 그렇지만 레이테 앞바다의 위기를 지칭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할시는 이 메시지를 읽으며 마지막 세 단어--<<THE WORLD WONDERS>>를 니미츠가 그에게 보낸 신랄한 비판( 경기병대의 돌격 같은 졸렬한 전투와 지휘 )으로 알고는 쓰고 있던 모자를 데크에 집어던지고 격노에 사로잡혀 흐느꼈다. 그의 참모장 로버트 카니 부제독이 그를 마주보고 <<그만하세요! 대체 무슨 생각입니까? 침착하세요!>>라고 말했다.    

결국 11시 15분 7함대의 위급메시지가 할시의 기함에 도착한 지 3시간 이상 지나서야  할시는 34기동부대를 사마르 쪽으로 돌리도록 명령했다. 이 시점에서 리의 전함들은 거의 오자와군의 함포사거리 안에 들어가 있었다. 그런데도 34기동부대 소속의 구축함들을 재급유하느라 다시 2시간 반이 소비됐다[4].

이렇게 연달아 지체되면서 34기동부대가 태피3의 생존자구조를 돕는 것 말고는 7함대에 어떤 실질적 도움을 주지도 못하고 쿠리타군을 산베르나르디노해협에서 달아나기 전에 요격하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16시 22분 사마르해전에 개입하려는 가망없고 더욱 뒤늦은 시도로서 할시 는 새로운 기동전단인 34.5기동전단을 배저 해군소장의 지휘 하에 편성했다. 3함대의 시속 59 km 이상의 고속전함 2 척, 아이오와 와 뉴저지, 그리고 34기동부대의 순양함 3 척과 구축함 8 척으로 구성해 남쪽으로 급파하고 리 부제독과 다른 전함 4척이 뒤따르게 했다. 모리슨이 말했듯이 배저의 전단이 일본중앙군을 요격하는 데 성공했더라도 쿠리타전함들의 화력에 압도됐을 것이다[4].

그러나 34.5 기동전단의 순양함과 구축함들은 일구축함 노와키를 산베르나르디노해협 앞에서 따라잡아 치쿠마의 생존자들을 포함한 승무원 전원과 함께 침몰시켰다.

엔가뇨곶전투 - 마지막 교전 

11시 15분 할시가 34기동부대를 남쪽으로 돌렸을 때 그는 뒤보스 부제독의 지휘 하에 순양함 4척과 구축함 9척으로 1개 기동 전단을 분리편성해 38기동부대에 다시 배속했다. 14시 15분 미쳐가 뒤보스에게 명령해 일본북방군의 잔존세력을 뒤쫓도록 했다. 그의 순양함들이 17시 00분 경순양함 치요다를 격침하고 20시 59분 구축함 하쯔즈키를 집요한 추격 끝에 가라앉혔다[4].  

오자와 제독이 뒤보스의 비교적 약한 기동전단이 전개된 것을 알아차리고 뒤보스를 화력에서 압도할 수 있었던 전함 이세 와 휴가에게 남쪽으로 돌아서 공격하도록 명령했지만 뒤보스의 기동전단을 발견하는 데 실패했다. 7함대를 지원하도록 할시가 리의 전함 6 척을 모두 후퇴시킨 탓에 38기동부대가 일본북방군 미끼함대의 반격에 취약해졌다. 23시 10분 미잠수함 잘라오가 오자와군의 경순양함 타마를 어뢰격침했다. 이것이 엔가뇨곶전투의 마지막 교전행위이며 10월 26일 후퇴하는 일본함대에 마지막 공습을 가한 것과 별개로 레이테해전의 막이 내렸다.   

할시에 대한 비판



윌리엄 F. “황소” 할시 제독. 레이테해전 당시 미 해군 제3함대의 사령관.


할시는 오자와 추격에 34기동부대를 북쪽으로 보낸 결정과 킨케이드가 처음 구원을 간청했을 때 제때 보내지 못한 것 때문에 비판을 받았다. 할시의 행위를 미해군 속어로 황소몰이(Bulls Run)라 부르는데 할시의 필명 황소(미 해군에서 빌 Bill 할시로 알려짐)와  남북전쟁의 불런전투(the Battle of Bull Run)를 조합한 말이다. 전투가 끝난 뒤 할시는 자신의 결정을 다음과 같이 정당화했다.  

<<항공모함항공기들의 정찰에 따르면 일본의 북쪽 항공모함부대가 10월 24일 오후 발견돼서 적해군부대의 전모가 드러났다.  꼼짝않고 산베르나르디노해협을 지키는 것은 유치해 보여서 새벽에 일본북방군을 공격하도록 이날밤 38기동부대를 북쪽으로 집중했다. 일본중앙군은 시부얀해에서 대파돼 더이상 7함대에 심각한 위협이 아니라고 믿었다.[4]>>  


또한 할시는 34기동부대를 항공모함호위 없이 해협수비에 남겨두면 육상기지항공기의 공격에 취약해졌을 것이고 반면에 34 기동부대의 전함들을 엄호하도록 고속항공모함 전단들 중 1개라도 뒤에 남겨두면  북쪽으로 오자와를 공습할 항공전력의 집중도가 떨어졌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모리슨은 리 제독이 자신은 어떠한 항공모함지원 없이 산베르나르디노해협을 지키도록 전함들을 완비했다고 전투 뒤에 말한 것을 적었다[4]. 게다가 할시가 7함대와 제대로 교신을 했더라면 77기동부대의 호위항공모함들이 34기동부대를 적절하게 공중지원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다.  쿠리타의 거대함선들의 맹공격 앞에서 이들 호위 항공모함과 스스로를 지키는 것보다 훨씬 쉬운 일이었다.   

할시가 그의 함대주력은 일본항공모함들을 공격하러 북쪽으로 돌진하는 동안에 이들 전함에 탑승한 채 34기동부대와 함께 뒤에 남았어야 했다는 사실이 그의 결정에 작용했을지 모르지만 이것은 십중팔구 사소한 것이다.  산베르나르디노해협 전선에서 나머지를 보내면서  3함대의 최고속전함 2척 즉 아이오와 와 뉴저지 가운데 한두 척에 항공모함들을 딸려 오자와를 추격했다면 완벽하게 실현가능(또한 논리적)했을 것이라고 지적받아왔다.  실제로 34기동부대 편성에서 할시의 원래 계획은 3함대의 전함 6 척 모두가 아니라 4 척만 넣는 것이었다. 그랬다면 강력한 전함부대로 산베르나르디노해협을 지키는 것이 뉴저지를 타고 직접 북쪽으로 간 할시의 행동과 양립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더 중요한 요인은 할시가 자신의 부대를 나누는 것을 철학적으로 반대했다는 것이다. 그는 2차대전 전의 자신의 글과 그뒤 자신의 행동을 옹호하는 기사와 인터뷰 모두에서 병력 집중을 강하게 신봉했다. 필리핀해전에서 널리 생각되듯이 지나치게 신중해서 일본함대 대부분을 달아나도록 허용했다고 레이먼드 스프루언스 제독에게 여러가지 비판이 있었던 것도 할시에게 많이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또한 할시는 그의 참모장 로버트 믹 카아니 해군소장도 진심으로 3함대의 모든 가용전력을 북쪽으로 보내 일본항공모함부대를 공격하기를 선호했다는 것에도 영향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할시는 나름 타당성이 있었고 그의 관점에서 주어진 가용정보로 봐서 행동에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첫째, 그는 쿠리타함대가 실제보다 더욱 심하게 손상받았다고 믿었다. 할시가 쿠리타의 계속적 전진을 그 함대가 여전히 심각한 위협이란 증거로 봤어야 했다는 주장이 있지만 자살시점까지 가망없는 시도를 고집하는 일본군인들의 잘 알려진 성향을 보면 이런 관점을 지지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할시는 쿠리타의 약해진 함대는 7함대가 충분히 처리할 수 있으므로 그의 함대를 나눌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두째, 할시는 일본해군의 항공전력이 얼마나 형편없는지와 오자와의 “미끼” 함대가 거의 항공기가 없음을 잘 알지 못했다. 할시는 사마르해전 사흘 전인 1944년 10월 22일 니미츠에게 보낸 편지에서 <마크 미쳐 제독이 일본놈들의 해군항공전력은 바닥났다고 믿는다>고 적었다[16]. 필리핀해전( 마리아나의 칠면조사냥 )에서 스프루언스 제독과 함께했던 미쳐 제독은 일본군의 너무 형편없는 전투능력을 보고 그런 결론을 도출했다[16]. 할시는 미쳐의 통찰을 무시하고 오자와함대가 아직도 심각한 공격을 가할 능력이 있다고 판단했다. 어떻게 보면 이해할 만하고 그 자신이 보기에 신중하며 위험에 대비한 보수적인 판단이었다. 훗날 할시는 그의 행동을 일부나마 설명했는데 자신은 오자와 함대가 ‘셔틀 폭격’ ( 폭격기가 폭격을 마친 뒤 처음 출격한 곳이 아닌 기지로 가서 재급유와 재무장을 하고 재출격하는 것/ 타겟을 가운데 놓고 두 기지를 왕복하며 폭격하는 것과 같다)을 하거나 그들이 레이테만에서 미군에 ‘자유투’(여기서는 마음놓고 폭격한다는 뜻)를 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고 밝혔다[8]. 그는 분명히 쿠리타의 전함과 순양함들이 똑같은 부대에 자유투를 하는 것은 그처럼 고려하지 않았다.           

할시가 겉보기에 신중하고 위협에 대비한 판단을 오자와의 항공모함들에 내리면서도 그것과는 어긋나는 판단을 쿠리타의 전함들에 내렸다는 사실은 아마도 항공모함를 이 전쟁의 주요위협수단으로 여기는 그의 이해할 만한 성향을 반영한다. 레이테만에서 할시는 특정상황에서는 전함과 순양함들이 아직도 극히 위험하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데 실패했으며 얄궂게도 자신의 의사를 적절하게 교신하는 데 스스로 실패함으로써 그러한 특정상황을 어느 정도 자초했다.  사마르해전에서 77.4기동전단의 지휘관이었던 클리프턴 스프레이그는 그 뒤 할시의 판단과 <할시가  7함대의 킨케이드 에게 그들의 북쪽 측면이 더 이상 보호받지 못 할 것이라고 못한다고 확실히 알리지 않은 실수>를 두고 할시를 매섭게 비판했다.

<<(산베르나르디노해협의) 이 출구를 더 이상 봉쇄하지 않는다는 어떠한 정보도 없는 상황에서 우리의 북쪽 측면이 충분한 경고 없이 노출될 리 없다고 가정하는 것이 타당했다.>>



7함대로부터 사마르 앞바다의 지원요청을 처음 받고 할시가 34기동부대를 남쪽으로 보내는 데 실패한 것을 모리슨은 이렇게 썼다.

<<킨케이드의 첫 다급한 구원요청 뒤에 34기동부대를 몇시간 일찍 분리편성했다면 그리고 재급유로 2시간 반 넘게 지연시켰던 구축함을 뒤에 남겼다면 미 해군의 전투부대지휘관 가운데 가장 경험 많은  리 제독이 지휘하는 현대전함 6척의 강력한 전열이 산베르나르디노해협 앞에 제때 도착해 쿠리타의 중앙군을 격멸했을 텐데... 해전에서 흔한 그런 돌발상황들만 없었다면 ‘리 제독이 T자전법을 펼쳐서 중앙군을 전멸시켰을 것’이라 믿을 충분한 이유가 있다.>>      


모리슨이 관찰했듯이 그 대신에

<<일본해군의 전체화력보다 강했던 3함대전열의 막강화력은  이미 심각히 손상된 경전투함을 한두 척 끝장낸 것 말고 결코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모리슨(1956), pp. 336-337 [17]



아마도 34기동부대의 지휘관으로서 작전보고서에서 리 부제독이 간결히 논평한 것들 가운데 가장 적나라한 것은 다음과 같다.

<<34기동부대로 작전하면서 아군선박이 적함대에 어떠한 전투손상도 초래하거나 가하지 못했다.>>


34기동부대의 1944년 10월 6일 ~ 11월 3일 작전보고서


손실


레이테해전의 손실은 모든 부대에 골고루 퍼져 있지 않았다. 구축함 USS히어만은 적군과 중과부적으로 싸웠지만 승무원 6명만 전사한 채 전투를 마쳤다. 연합군 호위항공모함의 선원과 항공요원 1,000 명 이상이 전사했다. 교신착오와 다른 실패들의 결과로 태피3의 매우 많은 생존자가 며칠 동안 구조받지 못해 많은 이가 불필요하게 죽었다[4][19].

전투의 장기화와 대규모화 때문에 레이테해전과 별도로 발생한 손실과 전투 직전 및 직후의 손실을 놓고 다양한 추산이 있다. 다음은 이러한 손실추산 가운데 하나이다[18].

연합군 손실

사마르 해전에서 미국은 최전선 군함 6척을 잃었다:
  • 경항공모함 1척: USS 프린스턴
  • 호위항공모함 2척: USS 갬비어베이, 세인트로( 카미카제 공격으로 침몰한 첫 대형 군함)
  • 구축함 2척: 호엘과 존스턴
  • 호위구축함 1척: USS 새뮤얼 B. 로버츠
  • 그 밖에 미 군함 4척이 손상받았다.

일본군 손실

일본군은 최전선 군함 26척을 레이테 해전에서 잃었다.
  • 함대 항공모함 1척: 즈이카쿠, 미끼였던 북방군의 기함
  • 경항공모함 3척: 주이호오, 치요다, 치토세
  • 전함 3척: 무사시( 일본 연합 함대의 옛 기함 ), 야마시로, 후소오
  • 중순양함 6척: 아타고, 마야, 스즈야, 초카이, 치쿠마, 모가미
  • 경순양함 4척: 노시로, 아부쿠마, 타마, 키누
  • 구축함 9척: 노와키, 하야시모, 야마구모, 미치시오, 아키즈키, 하츠유키, 와카바, 우라나미

전투의 여파

레이테해전으로 미국 6군의 레이테 해안교두보를 해상공격으로부터 지켜냈다.  그러나 레이테섬을 1944년 12월 말까지 완전히 정복하는 데 많은 격전이 필요했다. 지상의 레이테전투는 항공, 해상의 전투와 병행돼 일본군이 레이테섬에서 그들 병력을 보강하고 재급유하는 한편, 연합군은 그들을 차단하고 일련의 오모크만 상륙작전을 위해 제공권과 제해권을 장악하려 했다  ――  이들 교전을 총괄해 오모크만전투라고 한다[4].

일본제국해군은 선박과 인원의 유례없는 최대손실을 입었다. 레이테에서 연합국의 침공군을 몰아내는 데 실패해 필리핀상실이 명백해졌으며  일본이 동남아시아의 점령지와 완전히 차단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들 점령지는 일본의 사활이 걸린 자원들 특히 선박과 항공기에 필요한 석유를 공급했다. 조선소와 탄약 등의 제조공장이 일본 본토에 있었기 때문에 문제가 복잡했다. 결국 레이테의 상실로 1945년 류큐제도 침공의 길이 열렸다[3][4].  

일본제국해군의 주요 수상선박들은 기지로 되돌아가 틀어박혀 거의 완전히 활동을 못한 채 태평양전쟁의 남은 기간을 보냈다. 레이테해전과 일본의 항복 사이의 기간에 벌어진 단 하나의 주요작전은 1945년 4월의 자살적 출격(텐고작전의 일부)인데 전함 야마토 와 호위함들을 미국 항공모함항공기들이 파괴했다.    

레이테상륙에 따라 카미카제항공기를 처음으로 사용했다. 카미카제 1기가 10월 21일 호주의 중순양함 HMAS 오스트레일리아에 명중했다. 특별공격대의 조직적 자살공격이 사마르해전이 끝나갈 무렵인 10월 25일 시작돼 호위항공모함 세인트로를 파괴했다. J.F.C. 풀러 는 그의 저서 <서양의 결정적 전투들>에서 레이테해전의 결과를 이렇게 적었다.   

일본함대는 사실상 끝장났으며 지상기지의 항공기를 제외하고 그들의 적군은 반박의 여지 없이 제해권을 장악했다. 전쟁이 끝난 뒤 오자와 제독에게 질문하자 <<이 전투 뒤에 수상함대가 순전히 보조적 역할에 머물게 된 탓에 지상군과 특별공격대(카미카제)와 공군에 의존하게 됐다... 일부 특수선박을 제외하고 수상선박은 쓸모가 없어졌다.>>라고 답했다. 해군장관 요나이 제독은 레이테패전이 <<필리핀상실과 마찬가지>>라고 인식했다고 말했다. 이 전투의 더 큰 의미에 대해, 그는 <<이것으로 끝장났다고 느꼈다>>라고 말했다. [3]      


이 전투 몇 달 뒤 미해군은 미국민들에게 무엇인가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전투는 무시하기에는 너무 크고 너무 많은 미국군인들이 관련되고 너무 많은 인명이 손실됐다. 결국 미해군은 대부분의 정보를 <파퓰러 메카닉 Popular Mechanics> 지에 제공했다. 이 전투에 대한 기사를 출판해 미국민에게 이 전투가 할시가 계획한 대로 진행된 것처럼 보이게 했다. 할시가 산베르나르디노해협을 무방비로 만든 채 떠나버린 결정에 대한 진실이 미국민에게 알려진 것은 불과 몇년 전이다[19].

주석
  1. ^ a b Parkinson, Roger (March 1977). Encyclopedia of modern war. p. 132. ISBN 0 586 08321 9.
  2. ^ a b c Woodward, C. Vann (1947). The Battle for Leyte Gulf. New York: Macmillan.
  3. ^ a b c d e f g h i Fuller, John F. C. (1956). The Decisive Battles of the Western World. III. London: Eyre & Spottiswoode.
  4. ^ a b c d e f g h i j k l m n o p q r s t u v w x y z aa ab ac ad ae af ag ah ai aj ak al am an ao ap aq ar Morison, Samuel E. (1956). "Leyte, June 1944 – January 1945". History of United States Naval Operations in World War II. XII. Boston: Little & Brown.
  5. ^ a b c Thomas, Evan (2006). Sea of Thunder: Four Commanders and the last Great Naval Campaign, 1941–1945. New York: Simon & Schuster.ISBN 0743252217.
  6. ^ Smith, Robert Ross (2000) [1960]. "Chapter 21: Luzon Versus Formosa". Command Decisions. United States Army Center of Military History. CMH Pub 70-7. Retrieved 8 Decembe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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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 a b c d e Cutler, Thomas J. (1994). The Battle of Leyte Gulf, 23–26 October 1944. New York: HarperCollins. ISBN 0060169494.
  9. ^ a b c d Hornfischer, James D. (2004). The Last Stand of the Tin Can Sailors. New York: Bantam. ISBN 0553802577.
  10. ^ L, Klemen (1999-2000). "Rear-Admiral Takeo Kurita". Forgotten Campaign: The Dutch East Indies Campaign 1941-1942.
  11. ^ Tully (2009) [2009].
  12. ^ Tully, Anthony P (2009), Battle of Surigao Strait, Bloomington, ISBN 978-0-253-35242-2.
  13. ^ a b c Howard (1999).
  14. ^ Tully (2009), p. 167.
  15. ^ Tully (2009), p. 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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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 Note: Task Group 34.5 in fact only finished off the straggling destroyer Nowaki, and this was not achieved by the battleships, but rather by their accompanying cruisers and destroyers (Source: US Naval Historical Center).
  18. ^ Robert Jon Cox (14 July 2008). "The Battle of Leyte Gulf – Casualty List". Retrieved 7 November2010.
  19. ^ "The Battle That Won the Pacific." Popular Mechanics, February 1945, pp. 17-25

참고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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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utler, Thomas (1994). The Battle of Leyte Gulf: 23–26 October 1944. Annapolis, Maryland, U.S.: Naval Institute Press. ISBN 1-55750-2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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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ull, Paul S. (1978). A Battle History of the Imperial Japanese Navy, 1941–1945. Naval Institute Press. ISBN 0-87021-0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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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uller, J.F.C. (1956). The Decisive Battles of the Western World – Volume III. London: Eyre & Spottiswoode. ISBN 1135317909.
  • Hornfischer, James D. (2004). The Last Stand of the Tin Can Sailors. Bantam. ISBN 0-553-80257-7.
  • Hoyt, Edwin P.; Thomas H Moorer (Introduction) (2003). The Men of the Gambier Bay: The Amazing True Story of the Battle of Leyte Gulf. The Lyons Press. ISBN 1-58574-643-6.
  • Lacroix, Eric; Linton Wells (1997). Japanese Cruisers of the Pacific War. Naval Institute Press. ISBN 0-87021-3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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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ishida, Hiroshi (2002). "Imperial Japanese Navy".
  • Potter, E. B. (2005). Admiral Arleigh Burke. Naval Institute Press. ISBN 1-59114-692-5.
  • Potter, E. B. (2003). Bull Halsey. Naval Institute Press. ISBN 1-59114-691-7.
  • Sauer, Howard (1999). The Last Big-Gun Naval Battle: The Battle of Surigao Strait. Glencannon Press. ISBN 1-889901-08-3.
  • Stewart, Adrian (1979). The Battle of Leyte Gulf. Hale. ISBN 0709175442.
  • Thomas, Evan (2006). Sea of Thunder: Four Commanders and the Last Great Naval Campaign 1941–1945. Simon & Schuster. ISBN 0-7432-5221-7.
  • Vego, Milan N. (2006). Battle for Leyte, 1944: Allied And Japanese Plans, Preparations, And Execution. US Naval Institute Press. ISBN 1557508852.
  • Willmott, H. P. (2005). The Battle Of Leyte Gulf: The Last Fleet Action. Indiana University Press. ISBN 0253345286.
  • Woodward, C. Vann (1947 (reissue 2007)). The Battle for Leyte Gulf. Skyhorse Publishing. ISBN 160239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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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Warfare Archaeology 2012/06/11 11:35 # 답글

    2편도 마저 잘 읽었습니다. ^^
  • 무갑 2012/06/11 23:30 # 답글

    얼마전 히스토리채널에서 이 전투에 대한 다큐를 본 기억이 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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