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전쟁] 레이테 해전, 사상최대의 해상전투 (1/2) 태평양전쟁

(레이테해전 1/2)

레이테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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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서적은 [숫자]로 표기함. 참고서적 목록은 끝에 첨부.

레이테해전2차대전, 태평양전쟁의 일부
일자 1944년 10월 23-26일
장소필리핀제도의 레이테 만
결과연합군의 압승


미합중국, 호주일본제국
연합군 지휘관

윌리엄 할시 2세(제3함대)
토마스 C. 킨케이드(제7함대)
클리프턴 스프레이그(태피3/ 77.43기동전대)
제시 B. 올덴도르프(77.2기동전단)
존 오구스틴 콜린스(74기동부대)
일본 지휘관

쿠리타 타케오(중앙군)
니시무라 쇼지(남방군)
시마 키요히데(남방군)
오자와 지사부로(북방군)
세키 유키오(카미카제)
연합군 전력

함대항모 8척
경항모 8척
호위항모 18척
전함 12척
순양함 24척
구축함과 호위구축함 141척
다수의 PT보트와 부속함들
항공기 약 1,500기
일본군 전력

함대항모 1척
경항모 3척
전함 9척
중순양함 14척
경순양함 6척
구축함 34척+
항공기 300기+ (지상기지 항공기 포함)
연합군 손실

전사 약 3,000 명
경항모 1척
호위항모 2척
구축함 2척
호위구축함 1척
항공기 200기+ [1]
일본군 손실

전사 약 10,500 명
함대항모 1척
경항모 3척
전함 3척
순양함 10척
구축함 11척
항공기 약 500기(?) [1]


레이테해전(레이테만전투)은  필리핀해 2차전투로도 알려졌다. 제2차세계대전의 최대규모 해전이며 일부에서 사상최대로 본다[2]. 1944년 10월 23일에서 26일까지 필리핀제도의 레이테섬, 사마르섬 근해에서, 미합중국과 호주의 연합군함대와 일본해군 사이에 벌어졌다.  

그해 10월 20일  미군은 레이테섬을 침공해 일본 제국을 동남아시아 점령지에서 떼어놓고 일본의 공업과 군사력을 석유공급지에서 뿌리뽑으려 했다. 일해군은 남아있던 대형군함을 총동원해 연합군을 격퇴하려 했으나 미해군  3함대와  7함대의 반격으로 크게 져 다시는 그런 규모로 출격하지 못했다. 살아남은 대형전투함은 연료를 빼어낸 채 기지에 틀어박혀 태평양전쟁의 남은 날들을 보냈다.

시부얀해전, 수리가오해협전투,  엔가뇨곶전투, 사마르해전이 레이테해전을 이루는 4대해전이며 기타 여러 작전도 들어간다. 레이테해전은  카미카제특공을 일본이 조직해 감행한 첫 전투다[3][4]. 일본이 쏟아부은 항공기 숫자가 연합군 선박의 숫자보다 적을 만큼 쌍방 전력차가 뚜렷했다[5].

배경

미국은 1942년 8월부터 1944년 초에 걸친 작전으로  태평양 남부 및 중앙에 있는 많은 섬 기지에서 일본군을 몰아내고 다른 기지들( 솔로몬제도, 비스마르크열도,  애드미럴티제도, 뉴기니아, 마셜제도, 웨이크섬의 기지가 유명하다)을 고립시켰다.  1944년 6월 잇따른 미군 상륙작전들이 미 해군  5함대의 고속항공모함부대의 지원 아래 이뤄져 마리아나제도를 점령했다. 이 공세로써 미군은 일본이 굳게 지키려던 전략적 내부방어권을 구멍내고 보잉 B-29 수퍼포트리스 폭격기는 일본본토로 날아갈 기지를 얻었다.

필리핀해전에서 일본이 반격했지만 미해군은 일본항공모함들과 항공기 약 600기를 격파해 일해군을 항공모함 항공전력과 숙련 파일럿이 없다시피 만들었다[3].  뒤따르는 작전으로 어니스트 J. 킹 제독과 합참멤버들은 일본군을 필리핀 에 묶어놓고 타이완을 쳐 남아시아와 일본 사이를 잇는 바다에서 제해권을 장악하려 했다.  미육군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필리핀침공을 옹호했다. 이것도 일본보급선을 끊을 수 있었다.

필리핀을 일본군 손아귀에 남겨두면 미국의 위신을 손상하고 1942년 <<나는 돌아올 것이다>>고 선언했던 맥아더에게 개인적 상처를 줄 것이었다. 그리고 일본이 필리핀에  쌓아둔 공군력은 간과하기에 너무 위험하다고  합참 밖의 체스터 니미츠 제독을 비롯한 많은 고위장교들이 보았다. 처음에 니미츠와 맥아더는 상반되는 계획을 가졌다. 니미츠 제독은 타이완침공에 집중해 동남아시아 보급선을 끊으려 했다. 중국본토 침공기지로 타이완을 쓸 수 있지만 맥아더는 이것을 필요없다고 보았다.  맥아더, 니미츠 그리고 루즈벨트 대통령이 만난 것이 필리핀을 전략목표로 굳히는 데 기여했으나 필리핀 침공을 최종결정하는 데 일부의 주장만큼 크게 연관된 것은 아니었다.

니미츠는 결국 마음을 바꿔 맥아더를 따랐다[4][6]. 타이완침공은 미육군과 해병대 12개 사단이 있어야 한다는 평가도 있었다.  그때 미국이 태평양에서 동원가능한 것보다 큰 지상전력이었다.  호주육군은 모두 솔로몬제도, 뉴기니아, 네덜란드령 동인도, 그 밖의 여러 태평양 섬에서 싸우고 있었다. 타이완침공은 1944년말 태평양에서 연합군이 쓸 수 있는 것보다 큰 지상전력이 있어야 했지만 독일을 패망시켜 인적자원을  빼오기까지 어쩔 수 없었다[4].

마침내 맥아더군이 필리핀 중앙에 있는 레이테를 치기로 했다. 수륙양용군과 해군으로 이뤄진 근접지원군은 토마스 C. 킨케이드 부제독의 7함대가 맡았다. 그때  7함대는 미해군, 영국왕립해군과 더불어 카운티급 중순양함 HMAS슈롭셔 와 오스트레일리아 그리고 아마도  뉴질랜드와 네덜란드에서 온 군함도 몇 척 있었을 것이다.

윌리엄 F. 할시 제독의 3함대는 38기동부대( 지휘관 마크 미쳐 부제독 )가 주력으로 침공에 필요한 원거리엄호와 지원을 맡았다. 이러한 작전계획에서 전체를 단일하게 이끌 해군제독이 없는 것이 근본오류였다. 단일지휘가 없는 것이 상호교신 실패와 더불어 위기를 불러 일으키고 전략적 재앙이 될 뻔했다[3][4].

우연히 일본군 계획도 서로 분리된 함대 세 개를 움직였고 또한 전체를 이끌 지휘관이 없었다. 미국이 고를 옵션은 일해군이 보기에 불보듯했다. 일본의 연합함대 사령관 토요다 소에무 해군대장은 승리작전을 네 가지 마련했다. 쇼오 (첩捷/ 승첩/ 승리 )1호작전이 필리핀에서 주요 해상작전이고 쇼오2호, 쇼오3호, 쇼오4호는 각각 타이완, 류큐( 오키나와 ), 쿠릴열도 침공에 대응했다. 이들 계획은 복잡한 공세작전이었다. 일본이 보잘것없는 연료보유량을  바닥내더라도 한바탕 결전을 위해 긁어모을 수 있는 거의 모든 전력을 쏟아부었다.



레이테 해전의 4대 전투 

1. 시부얀해전 2. 수리가오해협 전투 3. 엔가뇨 곶 전투 4. 사마르전투. 

레이테 섬은 레이테 만의 왼쪽에 있다.



1944 년 10월 12일 할시 제독이 이끄는 3함대는 타이완과 류큐제도를 공습했다.  그곳 항공기지가 레이테상륙을 방해하리라 보았다. 일본지휘부는 쇼오2호작전을 발동해 3함대 항공모함들을 파상공격했다. 모리슨이 “항공모함 함재기와 지상기지 항공기 간에 벌어진  무자비한 전투”이라 언급한 전투에서 일본은 3일 동안 그 지역 거의  전체 항공전력인 600 기를 잃으며 크게 졌다.

필리핀침공이 뒤따르자 일해군은 쇼오1호로 넘어갔다. 쇼오1호작전에서 오자와 지사부로 부제독의 함대 북방군은 미군주력을 레이테 멀리 유인하는 임무를 맡았다.  북방군은 항공모함 몇 척이 있었지만 항공기나 숙련 항공요원이 거의 없었다. 이들 항공모함은 커다란 미끼였다. 미군호위부대가 미끼를 물고 멀리 나오면 다른 일본군 수상부대 두 개가 서쪽에서 레이테로 진격할 것이었다. 니시무라 쇼지 시마 키요히데 부제독이 지휘하는 남방군은 수리가오해협을 지나 미군상륙지점을 때리고 쿠리타 타케오 부제독이 거느린 중앙군은 최강공격군으로서 산베르나르디노해협을 지나 필리핀해로 뚫고 들어가 남쪽으로 선회해 역시 상륙지점을 치는 작전이었다[3][4].

이렇다면 아무래도 공격군이 하나 이상 궤멸하겠지만 토요다 는 전후에 미국심문관들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필리핀을 잃으면 함대가 살아남아도 남쪽바닷길이 모두 가로막힌다. 그렇다면 함대가 일본영해로 돌아가도, 연료공급을 받지 못한다. 그렇다고 남쪽수역에 머문들, 탄약과 무기 공급을 받지 못한다.  필리핀을 잃으면서 함대를 살려둬봐야 전혀 의미가 없었다.>>


-- 미합중국 전략폭격 서베이 (태평양) -- 일본 관리들에 대한 심문


팔라완수로의 잠수함작전(10월 23일)


(이 작전을 모리슨 은 팔로완수로교전[4]이라고 했지만 때때로 팔로완수로전투라고도 했다.)

브루네이 기지에서 나왔을 때 쿠리타가 이끄는 강력한 중앙군은 전함 5척(야마토, 무사시, 나가토, 콩고, 하루나), 중순양 함 10척(아타고, 마야, 타카오, 초오카이, 묘쿄, 하루고, 쿠마노, 스즈야, 토네, 치쿠마), 경순양함 2척(노시로, 야하기), 구축함 15 척으로 편성됐다[4].

쿠리타함대는 팔라완섬을 10월 22-23일 자정 무렵에 지났다. 미잠수함 다터 와 데이스는 수면 가까이 있었다. 10월 23일 00시 16분 다터는 레이더로 일본함대를 27,000 m  범위에서 탐지했다. 다터의 함장은 곧이어 잠망경으로 확인했다. 다터에서 접촉보고 세 개 가운데 첫번째를 보내는 사이 두 잠수함은 재빨리 뒤쫓았다. 최소 이들 가운데 1척을 야마토의 레이더조작수가 포착했으나 쿠리타는 적절한 대잠대책을 세우지 못했다[4].


미 해군 잠수함 다터 호


다터와 데이스는 수상에서 몇시간을 전속력항해한 끝에 쿠리타함대의 앞쪽에 자리잡아 동이 트자마자 수중공격을 가했다. 공격은 대성공이었다. 05시 24분 다터는 어뢰 6 발을 쏘아  최소 4 발이 쿠리타의 기함 중순양함 아타고에 맞았다. 10분 뒤 다터는 아타고의 자매함 타카오에도 한 차례 어뢰를 쏘아 2 발이 맞았다. 05시 56분 데이스 가 어뢰 4 발을 중순함 마야(아타고와 타카오의 자매함)에 맞혔다.

중순양함 아타고와 마야는 금방 가라앉았다[7]. 타카오가 구축함 두 척의 호위를 받으며 브루네이로 돌아가려는데 이들 두 잠수함이 추격했다. 10월 24일 이들 잠수함이 손상된 순양함을 그림자처럼  따라붙다가 다터가 봄베이모래톱에서 암초에 부딪혀 선체를 버려야 했다. 모든 승무원은 데이스가 구조했다. 타카오는 싱가포르로 귀환해 1945년 1월에야 묘코와  합류했다. 아타고의 침몰이 빨라 쿠리타는 살기위해 헤엄쳐야 했다. 그는 다른 일본구축함에 구조돼 야마토로 옮겨진다[4][8][9].

시부얀해전(10월 24일)



미 해군 함상전투기 F6F 헬캣


10월 24일 08시 무렵 시부얀해로 들어가던 일본중앙군이 발견돼 할시의 3함대소속 USS엔터프라이즈에서 출격한 VF-20 F6F-5 헬캣전투기, VB-20 SB2C-3 헬다이버급강하 폭격기, VT-20 어벤저뇌격기 편대가 공습했다. 막강전력이었지만 3함대는 당시 편성이 적군을 대처하기에 충분치 못했다. 앞서 10월 22일 할시는 항공모함전단 중 2 개를 보급과 재무장을 받도록 울리씨에 위치한 함대기지로 보냈다.


1944년 10월 브루네이를 출발하는 무사시 호


잠수함 다터가 접촉보고를 보내자 할시는 데이비슨의 항공모함전단을 다시 부르지만 ( 3 함대 소속의 ) 38기동부대에서 가장 강력한 맥케인 부제독의 항공모함전단을 울리씨로 계속 가게 했다.  할시는 결국 10월 24일 맥케인도 불렀다.  이런 늑장으로 최강의 항공모함전단은 다가오는 전투에서 하찮은 역할을 맡아 3함대는 전투기간 대부분을 전체항공전력의 거의 40%를 빼어버린 채  싸워야 했다.

10월 24일 아침 쿠리타군을 치는 데 3 개 전단만 쓸 수 있었는데 가장 좋은 위치에 있던  보우건이 이끄는 38.2기동전단은 불운하게도 최약체였다. 대형항공모함은 USS 인트레피드 1 척뿐  그 밖에 경항공모함 2 척을 보유했다. 10월 23일 맥케인을 곧바로 부르지 못해  전투기간 내내 3함대가 가진 중순양함 6 척 가운데 4 척이 사실상 빠졌다[4].

1944년 10월 24일 10시 30분 경 시부얀해. 보우건의 항공모함전단 소속의 항공모함 인트레피드 와 카보트에서 날아오른 항공기들이 전함 나가토, 야마토, 무사시에 폭탄을 명중시키고, 중순양함 묘코를 대파했다. 항공모함 인트레피오, 에섹스, 렉싱톤에서 제2파 공격이 이어져 에섹스에서 출격한 VB-15 헬다이버와 VF-15 헬캣들은 무사시에 다시 10발을 맞혀 무사시가 좌현으로 기울었다.  엔터프라이즈 와 프랭클린으로부터 제3파 공격이 더해져 무사시에 폭탄 11 발, 어뢰 8 발을 명중시켰다[4]. 



1944년 10월 24일 전방포탑 가까이 폭격을 받은 야마토 호


군용기의 공격범위에서 벗어나고자 쿠리타는 함대를 선회해 이미 무력화된 무사시를 지나쳐 17시 15분까지 기다려 산베르나르디노해협으로 다시 선수를 돌렸다. 무사시는 19시 30분에 뒤집혀 가라앉았다[4].

그 동안 오니시 타키지로 부제독은 루손에 주둔한 1항공함대에게 미해군 셔먼 소장이 지휘하는 38.3기동전단의 항공모함를 목표로 3 차례 파상공격하도록 지시했다.  38.3 기동전단 항공기들도 일본군 육상기지 항공기들이 레이테만의 연합군상륙 부대를 공습하는것을 막기 위해 루손에 산재한 비행장들을 공습하고 있었다.  오니시공격대는 각각 5, 6십 기로 구성됐다[4].



일 해군 뇌격기 요코스카 D4Y 스이세이(“혜성”. 연합군 코드네임 “쥬디”)


일본공격기 대부분은 초계비행 중이던 셔먼의 헬캣전투기들이 요격해 격추하거나 막아냈다. 에섹스에서 출격한 데이비드 맥캠벨이 이끄는 전투기편대 두 개가 가장 눈부신 활약을 했는데 그는 이 작전에서 일본기 6기 격추가 인정됐다. 그러나 일본기 1기( 요코스카 D4Y3 쥬디 )가 방어망을 뚫고 09시 38분 경항공모함 USS프린스턴에 551 파운드 철갑폭탄( 장갑관통용 폭탄 )을 떨어뜨려 격납고에 심각한 화재를 일으켰다.



경항모 프린스턴 호의 화재


프린스턴의 스프링쿨러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아 불길이 빠르게 퍼졌다. 줄줄이 폭발이 뒤따랐다. 화재는 점차 잡을 수 있을 듯했지만 15시 23분 엄청난 폭발(아마도 항공모함 고물에  있던 화약고에서)이 일어나 프린스턴에서 사상자가 더욱 생기고 화재진압을 도우러 왔던 순양함 버밍햄에서 더욱 큰 300 명 이상 사상자가 생겼다.  버밍햄은 심하게 파손돼 전열에서 빠졌다. 근처의 다른 선박들도 손상됐다. 프린스턴을 살리려는 모든 노력이 실패하자 경순함 리노가 17시 50분 어뢰를 쏘아 가라앉혔다[4].



프린스턴 호의 폭발


미3함대는 일본중앙군에 대해 주로 헬캣전투기로 모두 259 회 출격했다. 이런 공격 강도는 쿠리타의 위협을 충분히 없애는 데 모자랐다.  이것은 다음날 3함대가 오자와 함대에 대해 527 회 출격해 일본북방군을 크게 약화시킨 것과 대조된다. 게다가 시부얀해 공격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겨우 한 척의 배 즉 무사시에 대한 것이었다.  이 거대전함은 침몰하고 순양함 묘코는 무력화됐지만 쿠리타군의 다른 배들은 전투력을 유지하고 항진할 수 있었다. 할시 제독의 중대한 판단착오 덕분에 쿠리타 는 그날 밤 산베르나르디노해협을 지나 다음날 아침 사마르해변 앞에 예상을 깨고 극적으로 나타날 수 있었다[10].

34기동부대/ 산베르나르디노 해협


일본 남방군과 중앙군이 발견된 뒤 그러나 오자와의 항공모함들은 발견되기 전 할시와 3함대참모들은 전함 뉴저지에 승선해 쿠리타중앙군의 위협 앞에 비상대책을 준비했다.  그들의 목적은 3함대소속  2개 고속항공모함전단의 지원을 받는 고속전함으로 이뤄진 강력한 기동부대를 동원해 산베르나르디노해협을 지키는 것이었다. 이 전함부대는 34기동부대로 명명돼 전함 4척, 순양함 5척, 구축함 14척으로 편성해 윌리스 A. 리 제독이 지휘했다. 38.4기동전단의 랄프 E. 데이비슨 소장에게 34기동부대를 지원하는 항공모함전단들의 전체지휘를 맡겼다.  

10월 24일 15시 12분 할시는 애매한 단어들로 이뤄진 무전문을 휘하의 기동전단 지휘관들에게 보내 비상대책의 세부사항을 알려줬다.

BATDIV 7 MIAMI, VINCENNES, BILOXI, DESRON 52 LESS STEVEN POTTER, FROM TG 38.2 AND WASHINGTON, ALABAMA, WICHITA, NEW ORLEANS, DESDIV 100, PATTERSON, BAGLEY FROM TG 38.4 WILL BE FORMED AS TASK FORCE 34 UNDER VICE ADMIRAL LEE, COMMANDER BATTLE LINE. TF 34 TO ENGAGE DECISIVELY AT LONG RANGES. CTG 38.4 CONDUCT CARRIERS OF TG 38.2 AND TG 38.4 CLEAR OF SURFACE FIGHTING. INSTRUCTIONS FOR TG 38.3 AND TG 38.1 LATER. HALSEY, OTC IN NEW JERSEY.
—Morison (1956)

할시는 이 전문의 복사본을 태평양함대사령부의 니미츠 제독과 워싱턴의 킹 제독에게 보냈다. 그러나 정보를 보낼 주소에 킨케이드 제독( 7함대 )을 넣지 않았다[8]. 이 메시지는 어쨌든 7함대가 포착했는데 일반적으로 제독들은 무전병에게 <어떤 의도의 무전이든지 감지한 모든 메시지 통신>을 복사하도록 지시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할시가 34기동부대를 그가 명령할 때 편성하고 파견할 비상수단으로 의도했기에 그가 <편성될 것>이라고 적어놓은 것은 미래시제를 뜻했다. 그러나 34기동부대가 언제 또는 어떤 상황에서 편성될지 빠뜨렸다. 이런 생략으로 7함대의 킨케이드는 할시가 미래시제가 아니라 명령형으로 말하는 것으로 믿어 34기동부대가 이미 편성돼 산베르나르디노해협에 포진했다고 결론지었다. 진주만의 니미츠도 똑같은 결론을 내렸다. 할시는 17시 10분에 2차 메시지를 보내 34기동함대에 대한 자신의 의도를 밝혔다.

<<(산베르나르디노해협으로) 적군이 출격하면 34기동부대는 내가 지시할 때 편성될 것.>>

불행히도 할시가 이 메시지를 음성무전기로 보내는 바람에 7함대가 탐청하지 못했고 할시는 니미츠와 킹에게 전신으로 덧붙이지 않았다. 할시의 첫번째 메시지의 애매모함에서 생겨난 심각한 오해와 니미츠와 킹, 킨케이드 에게 자신의 메시지를 명확히 하지 못한 것은 이 전투의 경과에 심각한 영향을 끼쳤다[4][8].

할시의 결정( 10월 24일 )


3함대 항공기들이 오자와의 ( 유인용 미끼로 쓰는 ) 북방군을 10월 24일 16시 40분까지 발견하지 못했다. 이것은 주로 3함대가 쿠리타를 공격하고 스스로를 루손에서 출격한 일본기들의 공격에서 방어하는 데 사로잡힌 탓이었다. 그래서 아주 묘하게도 일부러 발견되고 싶었던 이 일본함대는 오히려 미군이 찾지 못한 유일한 함대가 되고 말았다. 10월 24일 저녁 오자와는 쿠리타가 (실제와 달리 ) 후퇴했다고  교신하는 미군전문을 가로채고 이에 따라 자신도 후퇴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20시 00분 토요다 소에무는 자신의 모든 함대에게 신의 도움을 믿으며 총공격하라고 명령했다.  3함대의 주의를 자신의 미끼함대에 쏠리도록 애쓰면서 오자와는 행로를 뒤집어 레이테를 바라보며 남진했다.   

할시는 ( 사실은 미끼인 ) 북방군이 주력이라고 확신해 일본의 최후까지 생존한 항공모함전력을 격파할 황금기회를 붙잡기로 결정했다. 중앙군을 그날 일찍 시부얀 해에서 3함대가 공습해 무력화시켰고 나머지는 후퇴하고 있다고 믿으며 할시는 니미츠와 킨케이드에게 무전을 쳤다.     

<<중앙군은 공습으로 심각히 손상. 새벽에 항공모함부대를 공격하러 3개 전단을 거느려 북진 중.>>

<3개 전단을 거느리고> 란 표현은 위험한 오해를 만들었다. 10월 24일 15시 12분에 가로챈 할시의 전문의 <34기동부대로 편성될 것>이라는 문구에 비추어 태평양함대 사령부의 니미츠가 그랬듯이 킨케이드와 참모들은 <리 제독이 지휘하는 34기동부대가 이제 별개의 독립체로 편성됐다>고 추정했다. 그들은 할시가 남아 있는 항공모함전단 세 개를 일본항공모함들을 추적하도록 북쪽으로 보내는 한편,  34기동부대라는 강력한 수상함대를 산베르나르디노해협을 지키도록 남겨두었다고 추정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때 34기동부대는 할시의 다른 부대와 분리되지 않았으며 리의 전함들은 3함대 항공모함들과 함께 북진하고 있었다. 할시는 산베르나르디노해협을 완전한 무방비로 남겨놓은 것을 알고도 떠났다. 우드워드가 <<산베르나르디노해협에서 모조리 뽑아갔다. 초계구축함조차  남겨두지 않았다.>>고 말했던 대로였다[2].     

할시와 참모들은 인디펜던스에서 운용하는 야간정찰기가 <<쿠리타 의 강력한 수상함대가 산베르나르디노해협으로 되돌아오며 오랜 등화관제 뒤에 항해등들이 다시 켜졌다>>고 보고한 것도  무시했다. 38.2기동전단을 지휘하는  제랄드 F. 보우건 소장이 이러한 정보를 할시의 기함에 보냈지만 어떤 참모에게 묵살당했다. 그 참모는 <<예, 예, 우리도 그 정보는 가지고 있소>>라고 간단히 답할 뿐이었다. 리는 오자와함대가 미끼역할을 한다고 올바로 추측하고 이것을 할시의 기함에 점등메시지로 보냈지만 역시 비슷하게 묵살됐다.  마크 미쳐 부제독의 참모 알레이 버크 준장과 제임스 플래틀리 중령도 똑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그들이 이런 상황을 몹시 걱정해 미쳐를 잠에서 깨우자 미쳐는 <<할시 제독도 이런 정보를 가지고 있는가?>>라고 물었다. 그들이 그렇다고 답하자 할시의 성질을 알고 있는 미쳐는 <<할시가 내 조언을 듣고 싶으면 자기가 물어보겠지>>라고 말하고 다시 자러 갔다. 3함대의 가용한 모든 전력은 산베르나르디노해협에서 멀어지며 북쪽으로 줄지어 계속 항해했다.                

수리가오해협전투


니시무라의 남방군은 전함 야마시로, 후소, 중순양함 모가미, 구축함 4척으로 짜였다. 이 함대는 10월 22일 15시 00분 쿠리타의 출발 뒤에 브루네이를 떠나 동쪽으로 돌려서 "술루 해"로 들어온 뒤에 북동쪽으로 네그로스섬의 남단을 지나 민다나오해로 들어갔다. 그리고 니시무라는 우현 쪽으로 민다나오섬을 끼고 북동쪽으로 나아가 수리가오해협의 남쪽입구로 들어가고 다시 해협의 북쪽입구를 나가 레이테만으로 들어가 쿠리타군에 화력을 더하려 했다.  

남방군은 10월 24일 미해군 폭격기의 공습을 받았으나 경미한 손상만 입었다.  중앙군과 남방군 사이에 무전이 엄금돼 니시무라는 시마 및 쿠리타와 공조해 기동하지 못했다. 02시 00분 수리가오해협으로 진입했을 때 시마는 그 46 km 뒤에 있고 쿠리타 는 아직도 시부얀해에 있어 레이테해변에서 수시간 거리였다.     

남방군이 수리가오해협으로 접근하면서 미7함대 지원군이 쳐놓은 무시무시한 덫으로 뛰어들었다. 제시 올덴도프 소장은 상당한 전력을 보유했는데 전함은 6 척으로 웨스트버지니아, 매릴랜드, 미시시피, 테네시, 캘리포니아 , 펜실바니아였다. 미시시피를 빼고 모두 진주만공격에서 가라앉거나 손상된 뒤 수리됐다. 테네시, 웨스트버지니아는 그후 재건조될 예정이었다.  8 인치와 6 인치 포를 가진 중순양함이 4척으로 USS 루이빌, 포틀랜드, 미니아폴리스,  HMAS 슈롭셔였다. 경순양함 4 척은 덴버, 콜럼비아, 피닉스, 보이시였다. 더욱 작은 구경의 포와 어뢰를 장비한 구축함 28 척과 고속어뢰정( PT보트) 39 척도 있었다. 해협을 통과해서 미군의 침공선단에 이르기 위해 니시무라는 PT보트와 이어지는 구축함 대군의 어뢰 집중공격을 받아야 하고 이어서 해협의 먼 입구를 가로질러 포진한 전함 6척과 측면을 노리는 순양함 8척의 집중포화 속을 지나야 했다[4].  

22시 36분 접근하는 일본함대를 PT보트 1 척(  PT-131 )이 접촉했다. 3 시간 반 이상 PT보트들이 니시무라군에 공격을 반복했다. 어뢰명중은 없었지만 올덴도프와 그 함대에 쓸모있는 접촉보고들을 보냈다[4].

니시무라의 선단이 수리가오해협에 진입하면서 그들 진행 축의 양쪽에 포진한 미군구축함들의 엄청난 어뢰공격의 표적이 됐다. 03시 00분 무렵 일본전함 2 척에 어뢰가 맞았다. 야마시로는 항해할 수 있었지만 후소는 USS멜빈( DD-680 )의 어뢰공격으로 폭발해 두동강났다. 니시무라의 구축함 4 척 중 2 척이 침몰했다. 다른 구축함 아사구모는 명중 당하고도 후퇴할 수 있었지만 나중에 침몰했다.

추가 증거가 빛을 보면서 위에 요약한 고전적 기술은 최근에 의문시되었다. 후소의 생존자 오가와 히데오는 1945년에 심문을 받고 이 전함의 마지막 항해를 글로 썼다[11]. 그는 “04시 00분 전함이 우현으로 천천히 뒤집히면서 오가와와 다른 이들은 물살에 씻겨 나갔다”고 말했다[12]. 후소는 우현에 어뢰 두세 발을 맞았다. 그중 어뢰 한 발이 연료화재를 일으켰다. 당시 일본해군의 연료는 정제가 불량해 순식간에 불길이 치솟는 경향이 있었다. 연료찌꺼기가 타오른 것이 후소가 폭발했다는 신화의 주된 원천인 듯하다.   

전함처럼 튼튼하게 만든 선박이 두동강나게 폭발해 각각의 토막이 수직으로 떠다녔다고 믿기는 매우 어렵다. 그러므로 후소의 운명에 대한 고전적 설명은 아무래도 있을 법하지 않다. 그래서 모리슨의 묘사가 세부에서 틀린 듯하다. 후소와 관련한 루머들은 이 배가 승무원 전원과 함께 침몰한 가장 큰 배라든가 또는 생존자들이 있었지만 미군이나 일본군 선박에게 구조를 거부당하고 침몰한 뒤에 생존자들이 마침내 육지까지 겨우 살아서 도착했지만 필리핀원주민들에게 살해됐다든가 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구축함 아사구모가 후소의 생존자들을 건져올렸지만 결국 그 구축함도 침몰하면서 모두 참사를 맞았다고 믿는다.

03시 16분 웨스트버지니아의 레이다가 니시무라군의 생존선박들을 38 km 범위에서 포착해 27 km에서 사격솔류션(  firing solution/ 각종 정보에 따른 표적의 방향과 거리 등등)을 산출했다. 웨스트버지니아는 적함대를 칠흑같은 밤에 추적했다. 03시 53분 전함은 8 문의 16 인치 주포를 20.8 km 거리에서 사격 개시, 야마시로를 첫번째 일제사격으로 타격했다. 모두 합쳐서 93 발을 쏘았고 캘리포니아 와 테네시가 합류해, 14인치 포탄 63 발과 69 발을 각각 쏘았다. 레이다관제장치 덕분에 이들 미군전함은 일본전함들이 열등한 사격관제장치로 반격하지 못하는 거리에서 명중시킬 수 있었다[4][13].

다른 미군전함 3 척은 뒤떨어지는 사격레이더를 장비해 사격솔루션을 얻기 어려웠다. 매릴랜드는 결국 다른 전함들의 포탄이 작렬하는 것을 보며 시각적으로 측정하는 데 성공해 16 인치 포탄 48 발을 쏘았다. 펜실바니아는 목표를 찾는 데 실패해 주포들이 침묵했다[4].

미시시피는 전투 막바지에서야 겨우 사격솔류션을 산출해 14 인치 포탄 14 발로 한차례 일제사격을 했을 뿐이다. 이것은 전함이 다른 대형군함에 가했던 최후의 일제사격으로 해군역사의 한 시대를 끝맺는 것이다. 야마시로와 모가미는 16인치와 14인치 철갑포탄들의 조합과 올덴도프의 순양함들의 측면사격으로 무력화됐다. 시구레는 되돌아 달아났지만 조종이 불가능해 멈춰섰다. 야마시로는 04시 20분 니시무라가 탑승한 채 침몰했다. 모가미와 시구레는 남쪽으로 해협을 내려가 후퇴했다.

남방군의 후미는  제2공격군으로 시마 부제독이 지휘하며 ( 타이완에 위치한 ) 마코 해군기지를 출발해 니시무라의 후방에서 약 64 km 떨어져 수리가오해협으로 접근했다. 접근경로에 썰물이 오는 것을 감안하지 못한 채 파나온섬 주변에서 항해한 탓에 시마의 항해는 초기부터 혼란에 빠졌다. 많은 섬에서 반사되는 탓에 일본레이다는 거의 쓸모없었다[14]. 이 레이다는 이런 조건에선 선박 특히 PT보트를 탐지하지 못했는데 PT-137이 경순양함 아부쿠마를 뇌격해 무력화함으로써 대열에서 이탈시켰다. 이어서 시마의 중순양함 2 척 나치 와 아시가라, 구축함 8 척은[4] 니시무라군의 잔여 세력과 마주쳤다. 실제는 후소의 두동강난 조각이었지만 니시무라의 전함 2 척의 잔해라고 생각하고 시마는 후퇴를 명했다. 이 와중에 그의 기함 나치는 모가미와 충돌해 모가미의 조타실까지 침수시켜 모가미를 후퇴 대열에서 뒤처지게 만들었다. 모가미는 결국 다음날 아침 침몰했다. 후소의 뱃머리쪽 조각은 루이빌의 포격에 침몰하고 고물쪽은 카니하아섬 앞에서 침몰했다. 니시무라의 7척 중에 시구레만 살아남았다. 시마의 배들은 수리가오해협전투에서 생존했지만 그들도 그 뒤 레이테 주변의 교전에서 침몰할 것이었다. 시구레는 대궤멸에서 멀리 달아났지만 결국 미군잠수함 USS백핀에 무릎꿇고 말라야의 코타바루 앞에서 침몰하며 37 명이 죽었다[4][13].     

루이빌의 전술보고는 <<05시 29분 2 차례 일제사격- 18 발- 정북 기준 160도, 18,900 야드에서 커다란 화재. 화재는 같은 거리, 정북 기준 180도의 제2 표적으로 옮겨붙음. … 제1 표적은 <후소의 화재>라고 부르던 것이고 제2 표적은 <모가미>였다.>>고 적었다[15].  모리슨과 몇몇 사람은 후소의 일부가 그때까지도 떠다녔다고 추정하지만 이것을 지지하는 증거는 없다.       

수리가오해협전투는 전함 대 전함의 사상최후 교전이었다. 또한 한쪽 함대가 상대 함대에 T자전법( Cross the T, 정자전법丁字戦法 )을 구사한 마지막 해전이었다. 그러나 당시 일본함대는 기진맥진한 상태였고 전함 겨우 1 척( 야마시로 ), 중순양함 1 척, 구축함 1 척으로 편성돼 T자 전법은 이름만 그럴 듯하지 전투결과에 거의 영향이 없었다[4][13].    


덧글

  • Warfare Archaeology 2012/06/11 11:31 # 답글

    호오~잘 읽었습니다. 일목요연한 정리 감사!! ^^
  • 뽀도르 2012/06/26 15:01 #

    감사합니다^_^)
  • 보키 2012/06/26 14:13 # 삭제 답글

    대단합니다. 너무 너무 위대해 보입니다.^^*
  • 뽀도르 2012/06/26 15:01 #

    몸둘 바를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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