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해보니 소설과는 제법 다르군요. 시험 삼아 인명은 굵은 글씨로, 기타 고유명사는 기운 글씨로 해봤습니다)
자치통감 권65
孝獻皇帝庚建安十二年(丁亥,公元二零七年)
春,二月,曹操自淳於還鄴。丁酉,操奏封大功臣二十餘人,皆為列侯。因表萬歲亭侯荀彧功狀;三月,增封彧千戶。又欲授以三公,彧使荀攸深自陳讓,至於十數,乃止。
曹操將擊烏桓,諸將皆曰:「袁尚亡虜耳,夷狄貪而無親,豈能為尚用!今深入征之,劉備必說劉表以襲許,萬一為變,事不可悔。」郭嘉曰:「公雖威震天下,胡恃其遠,必不設備,因其無備,卒然擊之,可破滅也。且袁紹有恩於民夷,而尚兄弟生存。今四州之民,徒以威附,德施未加,捨而南征,尚因烏桓之資,招其死主之臣,胡人一動,民夷俱應,以生蹋頓之心,成凱覦之計,恐青、冀非己之有也。表坐談客耳,自知才不足以御備,重任之則恐不能制,輕任之則備不為用,雖虛國遠征,公無憂矣。」操從之。行至易,郭嘉曰:「兵貴神速。今千里襲人,輜重多,難以趨利,且彼聞之,必為備。不如留輜重,輕兵兼道以出,掩其不意。」
헌제 건안 12년(정해년, 서기 207년)
봄 2월 조조가 순어 淳於[춘추시대에 순어국 淳於國이 있었다. 그와 유관한 지명인듯]로부터 업 鄴으로 돌아왔다. 정유 丁酉에 조조가 큰 공을 세운 신하들 스물 남짓을 열후에 봉했다. 만세정후 순욱의 공적을 적어 황제께 표를 올렸다. 3월 순욱에게 1천호를 더해서 봉했다. 다시 그에게 3공의 벼슬을 주려 했다. 그러나 순욱이 순유를 시켜 스스로 사양하겠다고 말한 게 십수 차례에 달하여 조조가 마침내 그만두었다.
조조가 오환을 치려 하자, 장수들이 모두 말했다.
"원상이 오랑캐에 도망갔을 뿐입니다. 이적[오랑캐]들이 탐욕스러운데다 그와 친한 게 전혀 없으니 어찌 원상이 이용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깊이 침입하여 정벌에 나서면, 유비가 분명히 유표를 설득해 허도를 습격하라 할테니 만일 변고가 생기면 뉘우쳐도 소용 없습니다."
곽가가 말했다.
"주공께서 비록 그 위세가 천하를 흔들고 있지만 오랭캐들은 그 멀리 떨어진 것을 믿고 틀림없이 방비가 없을 것입니다. 그 무방비를 틈타 급습하면 파멸시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날 원소가 민이 民夷[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었는데 원상 형제가 생존해 있습니다. 4주의 백성들은 우리의 위세에 눌려 복속하는 것이지 아직 은덕을 베풀지 못한 상태에서 여기를 버리고 남쪽 정벌에 나서면, 원상이 오환의 물자를 이용해 그 죽은 주공[원소]의 신하들과 오랑캐를 불러 함께 움직이면, 백성들이 모두 호응할 겁니다. 이렇게 해서 답돌[오랑캐 군주. 소설에선 묵돌로 나옵니다]의 마음을 움직이고 개유 凱覦[노리고 엿봄]의 계책을 이뤄 청주와 기주를 잃을까 두렵습니다. 유표는 앉아서 담론이나 즐기는 인간일 뿐입니다. 그 스스로 재주가 유비를 감당하기에도 모자란 것을 압니다. 막중한 임무를 유비에게 맡기면 그를 제어하지 못할까 두렵고, 가벼운 임무를 맡기면 유비를 제대로 쓰는 게 못 됩니다. 비록 우리가 나라를 비워놓고 원정한들 주공께서 걱정하실 게 없습니다."
조조가 그 말을 따랐다. 행군하다 역 易 [땅이름]에 이르러 곽가가 말한다.
"병귀신속[군사작전은 귀신처럼 재빠른 게 중요하다]입니다. 지금 천릿길을 가서 적을 습격하는데, 치중[군수물자]이 많아서는 신속히 이기기 어렵습니다. 게다가 적들이 알아차려 방비를 할 게 틀림없습니다. 치중을 놔두고 가볍게 무장하여 길을 서둘러 가서 적이 예상치 못할 때 덮치는 게 낫습니다."
初,袁紹數遣使召田疇於無終,又即綬將軍印,使安輯所統,疇皆拒之。及曹操定冀州,河間邢顒謂疇曰:「黃巾起來,二十餘年,海內鼎沸,百姓流離。今聞曹公法令嚴。民厭亂矣,亂極則平,請以身先。」遂裝還鄉里。疇曰:「邢顒,天民之先覺者也。」操以顒為冀州從事。疇忿烏桓多殺其本郡冠蓋,意欲討之而力未能。操遣使辟疇,疇戒其門下趣治嚴。門人曰:「昔袁公慕君,禮命五至,君義不屈。今曹公使一來而君若恐弗及者,何也?」疇笑曰:「此非君所識也。」遂隨使者到軍,拜為蓨令,隨軍次無終。
원래, 원소가 여러차례 사자를 보내 전주를 무종에서 부르며 그에게 장군 인 印을 주며 안집을 거느리게 하였으나 그가 모두 거절하였다. 조조가 기주를 평정하자 하간 사람 형옹이 그에게 말했다.
"황건적이 일어난 이후, 20년 남짓에 해내[천하]가 정비[솥의 물이 끓는 것 같이 어지러움]하여 백성들이 고향을 떠나 유랑을 하고 있소. 지금 듣자니 조 공께서 법령이 엄정하오. 백성들은 난리가 지긋지긋한데다 난리가 극에 달하면 평정될 것이니 이몸이 앞장설까 하오."
마침내 그가 짐을 꾸려 향리로 돌아간다. 전주가 말했다.
"형옹은 천민 天民[백성]의 선각자다!"
조조가 형옹을 기주 종사로 삼는다. 오환이 쳐들어와 고을의 관리들을 죽이는 것을 보고 전주가 분노해 그들을 토벌하고 싶지만 힘이 모자랐다. 조조가 사자를 보내 전주를 부르자 전주가 문하들을 몹시 재촉했다. 문인 門人이 물었다.
"예전에 원 공께서 선생을 사모해 예를 갖춰 5번이나 부르러 와도 선생께서 굽히지 않으셨습니다. 지금 조 공께서 사자를 한번 보냈는데도 선생께서 서두르시니 무슨 까닭입니까?"
전주가 웃으며 말했다.
"이것은 그대가 알 수 없는 까닭이오."
마침내 사자를 따라 조조 군대에 다다라, 수령 蓨令에 임명돼, 군대를 따라 무종에 머물렀다.
時方夏水雨,而濱海洿下,濘滯不通,虜亦遮守蹊要,軍不得進。操患之,以問田疇。疇曰:「此道,秋夏每常有水,淺不通車馬,深不載舟船,為難久矣。舊北平郡治在平岡,道出盧龍,達於柳城。自建武以來,陷壞斷絕,垂二百載,而尚有微徑可從。今虜將以大軍當由無終,不得進而退,懈弛無備。若嘿回軍,從盧龍口越白檀之險,出空虛之地,路近而便,掩其不備,蹋頓可不戰而禽也。」操曰:「善!」乃引軍還,而署大木表於水側路傍曰:「方今夏暑,道路不通,且俟秋冬,乃復進軍」。虜候騎見之,誠以為大軍去也。
당시 여름에 비가 내려 해안지대가 물에 잠기고 흙탕물에 길이 끊겼다. 게다가 오랑캐들이 요충지를 틀어막아 조조 군대가 전진하지 못했다. 조조가 그 점을 걱정해 전주에게 묻자 물었다.
"이 길은 여름에 늘 홍수가 나서 얕은 곳은 수레와 말이 다니지 못하고, 깊은 곳이라 해도 배가 다니지는 못하여 해결하지 못한 지 오래 됐습니다. 옛날에 북평군 北平郡이 평강에서 다스려 도로가 노룡을 나가 유성에 달했습니다. 건무황제 이래, 그곳을 빼앗겨 단절된 게 200년에 이르렀지만 아직 길이 조금 남아 있어 그 길을 따라 갈 수 있습니다. 지금 오랭캐 장수는 우리 대군이 당연히 무종을 지나 진퇴양난에 빠졌다 생각해 그 마음이 해이해져 방비가 없을 것입니다. 만약 조용히 군사를 돌려, 노룡 입구로부터 백단의 험준한 지형을 지나, 텅빈 곳으로 나가, 지름길로 이용해 그 무방비를 덮친다면 답돌[오랑캐 군주]을 싸우지도 않고 잡을 수 있습니다."
조조가, 훌륭하오! 라고 말하고 군사들을 이끌고 돌아가 큰 나무들을 베어 물 옆 길가에 깔고 말하였다.
"지금 여름인데 날씨는 덥고 도로는 끊겨 잠시 가을 겨울까지 기다려 다시 진군하겠소."
정찰에 나선 오랑캐 기병이 그것을 보고 참으로 대군이 물러간다 생각했다.
操令疇將其眾為鄉導,上徐無山,塹山堙谷,五百餘里,經白檀,歷平岡,涉鮮卑庭,東指柳城。未至二百里,虜乃知之。尚、熙與蹋頓及遼西單于樓班、右北平單于能臣抵之等將數萬騎逆軍。八月,操登白狼山,卒與虜遇,眾甚盛。操車重在後,被甲者少,左右皆懼。操登高,望虜陣不整,乃縱兵擊之,使張遼為先鋒,虜眾大崩,斬蹋頓及名王已下,胡、漢降者二十餘萬口。遼東單于速僕丸與尚、熙奔遼東太守公孫康,其眾尚有數千騎。或勸操遂擊之,操曰:「吾方使康斬送尚、熙首,不煩兵矣。」九月,操引兵自柳城還。公孫康欲取尚、熙以為功,乃先置精勇於廄中,然後請尚、熙入,未及坐,康叱伏兵禽之,遂斬尚、熙,並速僕丸首送之。諸將或問操:「公還而康斬尚、熙,何也?」操曰:「彼素畏尚、熙,吾急之則並力,緩之則自相圖,其勢然也。」操梟尚首,令三軍:「敢有哭之者斬!」牽招獨設祭悲哭,操義之,舉為茂才。時天寒且旱,二百里無水,軍又乏食,殺馬數千匹以為糧,鑿地入三十餘丈方得水。既還,科問前諫者,眾莫知其故,人人皆懼。操皆厚賞之,曰:「孤前行,乘危以徼幸。雖得之,天所佐也,顧不可以為常。諸君之諫,萬安之計,是以相賞,後勿難言之。」
조조가 명령하여 전주가 그 무리를 이끌고 향도[길잡이]가 된다. 조조 군대가 서무산을 올라 산을 파고 골짜기를 매워 5백여 리에 달했다. 백단을 경유해 평강을 지나 선비정을 건너 동쪽으로 유성을 향했다. 2백여 리를 남겨두고 오랑캐가 조조 군대가 오는 것을 탐지했다. 원상과 원희가 답돌, 요서의 선우 누반, 우북평의 선우 능신저지 등과 더불어 기병 수만을 이끌고 맞받아 치러 나왔다.
8월에 조조가 백랑산에 올라 갑자기 오랑캐 무리와 마주쳤는데 그들의 군세가 몹시 성대하였다. 그가 치중[군수물자]을 후방에 두고 와 갑옷을 걸친 이가적어 측근들이 모두 두려워하였다. 그가 높이 올라가 바라보니 오랑캐 진영이 정비가 안 돼 있었다. 이에 그가 군사들을 총돌격시켜쳐부수는데 장요를 선봉 삼았다. 오랑캐 무리가 크게 무너져 조조 군대가 답돌과 다른 왕들과 부하들을 베어죽이고, 오랑캐나 한족 투항자들이 20만 남짓에 달했다. 요동의 선우 속복환이 원상, 원희와 더불어 요동 태수 공손강에게 달아났다. 그 무리는 그래도 수천 기에 달했다. 누군가 조조에게 그들을 추격할 것을 권하자 그가 말했다.
"내가 공손강에게, 원상과 원희의 머리를 베어버리라 시켰으니 병사들을 수고시킬 것 없소."
9월, 조조가 병력을 이끌고 유성으로부터 돌아왔다. 공손강이 원상, 원희를 죽여 공을 세우려 하였다. 이에 그가 정예한 용사들을 마구간에 숨긴 뒤 원상과 원희를 불러들였다. 그들이 미처 앉기도 전에 공손강이 복병들을 소리쳐 불러 그들을 사로잡았다. 마침내 그들의 머리를 잘라 속복환의 잘린 머리와 함께 조조에게 보냈다. 장수들 가운데 누군가 물었다.
"공께서 돌아오시자 공손강이 원상과 원희를 보낸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그가 평소 원상과 원희를 두려워 했소. 내가 그를 압박하면 그들이 힘을 합칠 것이요 느슨하게 하면 서로 다툴 것이었소. 돌아가는 사정이 그랬소."(소설에선 곽가가 죽으면서 계책을 남긴 것으로 나오지요)
조조가 원상의 머리를 높이 매달고 삼군에게 명하였다.
"감히 그를 위해 우는 자는 처형하라!"
견초가 홀로 제사를 올려 슬프게 울자 조조가 그를 의롭게 여겨 무재 茂才로 천거했다. 그때 날씨가 춥고 메말라 2백리를 가도 마실 물이 없었다. 게다가 군량이 모자라 말 수천 필을 잡아 먹었다. 땅을 30 길[소설에선 서너 길인데 ...]을 파서야 물을 얻을 수 있었다. 돌아오자마자 조조가 지난번에 출병을 말린 사람들을 찾았다. 모두 그 이유를 몰라 사람마다 두려워하였다. 조조가 그들 모두를 크게 포상해 말했다.
"내가 지난번에 출병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요행히 이겼소. 비록 성공했지만 하늘이 도와서요. 돌이켜보면 칭송받을 만하지 못하오.여러분이 간언한 것은 만전을 기하는 계책이었으니 이에 상을 내리오. 이 뒤에도 말을 꺼내는 것을 어려워 마시오."
[보충자료] 백전기략 百戰奇略
(주원장을 도와 명나라를 세운 유기의 작품)
建安十二年,袁尚、熙奔上谷郡,〔引〕烏桓數入塞為害。曹操征之。夏五月,至無終;秋七月,大水,傍海道路不通。田疇請為鄉導,操從之,率兵出盧龍塞,水潦,塞外道絕不通,乃塹山堙谷五百餘里,經白檀,歷平剛,涉鮮卑庭,東指柳城。未至二百里,虜方知之。尚、熙與蹋頓、遼西單于樓班、右北平單于能臣抵之等將數萬騎逆軍。八月,登白狼山,卒與虜遇,眾甚盛。操輜重在後,披甲者甚少,左右皆懼。操登高而望,見虜陣不整,乃縱兵擊之,使張遼為先鋒,虜眾大潰。斬蹋頓及名王以下,胡、漢降者二十餘 萬口。
건안 12년 원소의 아들들인 원상, 원희가 상곡군으로 달아났다. 그들이 오환의 병력을 이끌고 여러차례 변경을 침범해 해를 끼쳤다. 조조가 정벌에 나섰다. 여름 5월 무종에 이르렀다. 가을 7월 홍수가 나 해안지대의 도로가 끊겼다. 전주가 길앞잡이를청하여 조조가 허락했다. 병력을 이끌어 노룡새를 나갔다. 홍수가 나 새외[만리장성 북쪽을 통칭]의 도로가 끊겼다. 이에 5백여리에 걸쳐 산과 골짜기를 돌파하여 백단을 경유해서 평강을 지나 선비정을 건너 동쪽으로 유성을 향했다.
2백 리를 남겨두고 오랑캐가 알아차렸다. 원상, 원희가 답돌, 요서 땅의 선우 누반, 우북평의 선우 능신저지 등과 더불어 기병 수만을이끌고 요격에 나섰다. 8월에 조조 군대가 백랑산에 올랐다가 갑자기 오랑캐 군대와 맞닥뜨렸는데 그들이 몹시 강성했다. 조조가 치중을 후방에 두고 온 탓에 갑옷을 걸친 군사들이 몹시 적어, 그 측근들이 모두 두려워 하였다. 그가 높이 올라가 멀리 바라보니 오랑캐의 진세가 정비가 안 돼 있었다. 이에 그가 병력을 총돌격시키고 장요를 선봉에 세워 오랑캐 무리가 크게 무너졌다. 답돌과 다른 왕들과 그 부하들을 참했다. 오랑캐와 한족을 아울러 투항자들이 20만 남짓에 달했다.




덧글
유노윤아 2009/10/09 23:12 # 답글
후반에 장료가 툭 튀어나와서 조금 놀랐습니다.장료는 관도전을 전후해서 조조에게 중용된 모양입니다. 귀순한지 꽤 된 것도 아닐텐데.
뽀도르 2009/10/10 10:12 #
백랑산 전투는 장요(장료. 어려서부터 읽은 삼국지에 장요라 나와서 익숙하군요-_-;)의 중요 전투 중 하나인가 봅니다. 백랑산 전투가 207년인데 장요가 귀순한 게 여포가 죽은 때니까 그래도 거의 10년은 된 시점이지요.중국어 위키를 보면 백랑산 전투에서 장요가 투지가 넘쳐 조조에게 접전을 적극 권한 것으로 나오네요. (途中遇上烏桓軍,張遼鬥志昂揚,力勸曹操接戰。)
시무언 2009/10/10 05:12 # 삭제 답글
장료가 중용되서 고참인 이전등과는 사이가 안좋았다고 하죠
뽀도르 2009/10/10 10:12 #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