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정 전투 倉亭之戰
창정 전투는, 중국 후한 말기, 관도 전투에서, 하북의 강력한 군벌이던 원소 본초에 대승을 거둔 조조 맹덕이 수행한 소탕 작전의 일부다. 창정은 명나라 소설가 호해산인 나관중[나본]이 지은 인기 소설 «삼국연의»에서 원소와 조조가 마지막으로 충돌한 전투로 알려졌다.
정사에 나타난 기록
관도에서 원소가 패전한 뒤 황하 북쪽 원소 영내의 많은 성읍들이 반란하고 조조에게 붙었다. 그런데도 조조는 앞선 전투에서 전력을 소진해 이런 상황을 이용할 수 없었다. 원소는, 관도 싸움터 동쪽 황하 하류에 위치한 고립된 교두보이던 창정(오늘날 산뚱성 양구의 북쪽)에서 황하 남쪽에 주둔하였다.
조조의 원래 구상은 원소를 이겨 남쪽으로 형주 지방을 장악한 유표 경승 그리고, 죽은 형 손책 백부로부터 새로이 그의 영지를 물려받은 손권 중모에게 공세를 돌리는 것이었다. 전략가 순욱 문약은, 최근 패배한 후 내분에 직면한 원소와의 문제를 조조가 우선 매듭지어야 한다는 이유를 들어 그런 작전을 재고하도록 조언했다. 순욱은 또한 이런 시점에서 남쪽으로 초점을 바꾸는 것의 위험성을 인식했는데, 그 틈을 타서 원소의 잔여세력이 결집해 조조의 후방을 공격할 수 있어서였다. 그래서 조조는 원래 구상을 버려 원소를 치는 작전을 지속했다.
조조는 안민(오늘날 산뚱성 뚱핑의 남동쪽)으로부터 곡식을 걷기 위해 갔다. 이 지역은 창정에 주둔한 원소 진영과 거리가 가까울 뿐 아니라 관도에 있던, 조조의 예전 수비 위치와도 가까웠다. 조조가 강물을 건너 공격을 가하기 위해서는 원거리에서 물자를 보급해야 했을지도 모르지만, 그가 긁어모은 물량은 황하 북쪽의 원소의 자원들과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해 여름, 음력 4월 조조가 상류로부터 병력을 이끌고 내려가, 창정에 주둔해 있던 원소의 부하들을 공격해 이겼다. 이 전투 결과, 황하 남쪽에 잔존해 있던 원소의 마지막 부대들이 소탕됐다.
그뒤 음력 9월 조조는 그의 근거지이던 허창으로 돌아가 휘하 병력들에게 필요한 휴식을 몇달간 주었다. 원소는 그 영내의 반란세력을 진압하러 패잔병들을 다시 모아 곧 통제를 재확립하고 구질서를 회복했다. 다음해 202년 여름 음력 5월 원소가 잇따른 패전에 따른 울화와 질병으로 사망해 그 영토는 아들들이 골육상쟁으로 다투는 가운데 조조가 서서히 덮쳐왔다.
중국 역사서 «자치통감»을 보면
資治通鑑/卷064 夏,四月,操揚兵河上,擊袁紹倉亭軍,破之。秋,九月,操還許。操自擊劉備於汝南,備奔劉表,龔都等皆散。表聞備至,自出郊迎,以上賓禮 ...
«자치통감/권64» 여름 음력 4월 조조가 하상[황하상류]에 병력을 주둔하여 원소의 창정 주둔군을 공격해 격파했다. 가을 음력 9월 조조가 허창으로 돌아왔다. 조조가 스스로 여남에서 유비를 공격해 유비가 유표에게 달아나고, 공도를 비롯한 무리도 모두 흩어졌다. 유비가 온다 듣고 유표가 직접 교외로 나가 상빈의 예로써 ...
창정 전투는, 중국 후한 말기, 관도 전투에서, 하북의 강력한 군벌이던 원소 본초에 대승을 거둔 조조 맹덕이 수행한 소탕 작전의 일부다. 창정은 명나라 소설가 호해산인 나관중[나본]이 지은 인기 소설 «삼국연의»에서 원소와 조조가 마지막으로 충돌한 전투로 알려졌다.
정사에 나타난 기록
관도에서 원소가 패전한 뒤 황하 북쪽 원소 영내의 많은 성읍들이 반란하고 조조에게 붙었다. 그런데도 조조는 앞선 전투에서 전력을 소진해 이런 상황을 이용할 수 없었다. 원소는, 관도 싸움터 동쪽 황하 하류에 위치한 고립된 교두보이던 창정(오늘날 산뚱성 양구의 북쪽)에서 황하 남쪽에 주둔하였다.
조조의 원래 구상은 원소를 이겨 남쪽으로 형주 지방을 장악한 유표 경승 그리고, 죽은 형 손책 백부로부터 새로이 그의 영지를 물려받은 손권 중모에게 공세를 돌리는 것이었다. 전략가 순욱 문약은, 최근 패배한 후 내분에 직면한 원소와의 문제를 조조가 우선 매듭지어야 한다는 이유를 들어 그런 작전을 재고하도록 조언했다. 순욱은 또한 이런 시점에서 남쪽으로 초점을 바꾸는 것의 위험성을 인식했는데, 그 틈을 타서 원소의 잔여세력이 결집해 조조의 후방을 공격할 수 있어서였다. 그래서 조조는 원래 구상을 버려 원소를 치는 작전을 지속했다.
조조는 안민(오늘날 산뚱성 뚱핑의 남동쪽)으로부터 곡식을 걷기 위해 갔다. 이 지역은 창정에 주둔한 원소 진영과 거리가 가까울 뿐 아니라 관도에 있던, 조조의 예전 수비 위치와도 가까웠다. 조조가 강물을 건너 공격을 가하기 위해서는 원거리에서 물자를 보급해야 했을지도 모르지만, 그가 긁어모은 물량은 황하 북쪽의 원소의 자원들과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해 여름, 음력 4월 조조가 상류로부터 병력을 이끌고 내려가, 창정에 주둔해 있던 원소의 부하들을 공격해 이겼다. 이 전투 결과, 황하 남쪽에 잔존해 있던 원소의 마지막 부대들이 소탕됐다.
그뒤 음력 9월 조조는 그의 근거지이던 허창으로 돌아가 휘하 병력들에게 필요한 휴식을 몇달간 주었다. 원소는 그 영내의 반란세력을 진압하러 패잔병들을 다시 모아 곧 통제를 재확립하고 구질서를 회복했다. 다음해 202년 여름 음력 5월 원소가 잇따른 패전에 따른 울화와 질병으로 사망해 그 영토는 아들들이 골육상쟁으로 다투는 가운데 조조가 서서히 덮쳐왔다.
중국 역사서 «자치통감»을 보면
資治通鑑/卷064 夏,四月,操揚兵河上,擊袁紹倉亭軍,破之。秋,九月,操還許。操自擊劉備於汝南,備奔劉表,龔都等皆散。表聞備至,自出郊迎,以上賓禮 ...
«자치통감/권64» 여름 음력 4월 조조가 하상[황하상류]에 병력을 주둔하여 원소의 창정 주둔군을 공격해 격파했다. 가을 음력 9월 조조가 허창으로 돌아왔다. 조조가 스스로 여남에서 유비를 공격해 유비가 유표에게 달아나고, 공도를 비롯한 무리도 모두 흩어졌다. 유비가 온다 듣고 유표가 직접 교외로 나가 상빈의 예로써 ...




덧글
시무언 2009/09/30 13:00 # 삭제 답글
조조는 한번 전투 하려면 자기가 직접 가는 성격때문에 많이 피곤했겠습니다.유비 같은 경우는 형주4군 정벌때나 관우의 북벌때보면 믿을만한 장군에게 맡기기도 하던데.
뽀도르 2009/09/30 13:48 #
그만큼 조조는 후방이 안정돼 있었다는 것일지도...
nishi 2009/09/30 14:59 # 답글
좀 상관없는 이야긴에 조조 맹덕 이런 식으로 하지 않고 조맹덕...그러니까 성명을 붙여쓰고 뒤에 자를 넣는 방식은 잘못된 방식이라는 이야기가 있더군요.
그냥 성 뒤에 자를 쓴다고..
뽀도르 2009/09/30 15:21 #
사실 조맹덕, 유현덕이 익숙하지요-_-; 조조 맹덕처럼 익숙하면 좋은데 다른 사람, 순욱 문약 같으면 자칫 순욱과 문약 두 사람으로 보일 수 있겠다 싶긴 했습니다. 한자 대신 한글로 써서 좀 구별이 되게 하려는 시도였는데.. 이번으로 시도를 중단해야 할듯 ㅋㅋ 조조맹덕 붙여쓰기도 그렇고... 차라리 예전 맞춤법처럼 성과 이름은 띄워쓰는 게 변별력은 좀 나을 듯 싶습니다.
시무언 2009/09/30 15:49 # 삭제 답글
조조 맹덕, 유비 현덕같은 표기는 일본식이라고 하더군요. 자라는것이 원래 이름을 대신하는 거라서 이름과 자를 함께 부를 이유가 없다고 하더라고요.
뽀도르 2009/09/30 15:57 #
그렇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