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사삼국지] 관도대전의 진행과 후대의 평가 원문삼국지 原文三國志

관도대전

[인명 뒤은 ()는 자 字]


관도대전은 중국역사의 삼국시대를 앞두고 동한 헌제 건안 5년, 서기 200년 관도 官渡(현재 하남성 중모 동북쪽)에서 일어난 전투다. 삼국시기 삼대전투의 하나로 중국역사상 약한 전력으로 강한 전력을 이긴 것으로 유명하다.

이것은 군벌, 조조(맹덕)의 결정적 승리여서 그의 영토를 라이벌 군벌, 원소(본초)로부터 지켜냈다. 이 전투는 조조와 원소의 전쟁에서 전환점이 되었다. 이 전투는 조조의 점진적 북부 중국 통일의 시작이었다.

지휘관

  • 원소 군대: 원소, 장합, 안량, 문추, 순우경, 원상, 원담
  • 조조 군대: 조조, 조홍, 조창, 하후돈, 왕충, 하후연, 관우

병력

  • 원소 군대: 약 11만
  • 조조 군대: 약 3만~4만

사상

  • 원소 군대: 8만
  • 조조 군대: 미상

배경

196년 조조가 헌제를 맞아들여 허창으로 도읍을 옮기고부터 천자를 끼고 제후들을 호령하며 위세가 커진다. 그는 먼저 여포와 원술을 쳐서 무찌르고 연주와 서주를 점령해서 예주와 사예 지방도 일부 차지한다. 198년 여포가 조조에게 사로잡혀 죽고, 199년 6월 원술이 병사하고, 11월 장수가 조조에게 투항했다. 199년 원소가 공손찬에게 최후의 승리를 거둬 유주, 기주, 청주, 병주를 점령해 황하 북쪽을 모조리 장악하고 강력한 군대를 거느리게 된다. 그리하여 남쪽으로 진군하여 천하를 장악하려 마음먹는다. 군벌 조맹덕과 원본초 사이에 무력충돌이 불가피하다는 게 점점 뚜렷해진다.

조조는 황하 남쪽 대부분을 통제하고 괴뢰 황제 헌제를 그의 새 도읍 허창에 모시고  있었다. 그러나 조조 군대는 원소 군대만큼 강하지 못하였다. 이들 군벌은 서로를 중국을 제패하는 데 있어 걸림돌로 여겼다.

관도전투에 앞서 원소의 참모들인 저수와 전풍(원호)은 중국을 제패할 야심에 찬 주공에게 조조가 위협이 되리라 내다봤다. 그들은 원소에게 조언하여 여전히 군대를 증강하던 조조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라 하지만 원소는 무시한다. 조조와 원소 사이의 긴장은 조조가 낙양으로부터 헌제를 받아들여 조조의 근거지 허창에 모신 이래 존재했다.

원소는 공손찬을 제거하여 후방에 걱정거리가 없고 지역이 광대하고 인구가 많아 가용병력이 10만 이상이었다. 조조는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여 북방의 원소를 제거하려면 관중 지방의 여러 장수들이 관망하고, 남쪽으로 유표와 장수가 항복하지 않고, 동남쪽으로 손책이 꿈틀거리고 있고 잠시 조조에게 붙어있던 유비도 겉과 속이 달랐다. 이러한 상황이었지만 조조에게는 당시의 유능한 인물들이 여럿 있었다. 순욱, 곽가, 그리고 장수 휘하에 있던 가후, 양주의 종사 양부 등이 여러모로 조조와 원소의 우열을 비교한 뒤 원소는 겉으로 너그러우나 속이 좁고 꾀는 좋아해도 결단이 없다는 이유로 다들 조조를 좋게 보고 귀순했다.


199년 장수가 가후의 권고를 따라 조조에게 귀순했다. 유표는 겉으로 원소를 지지하겠다 응답하지만 출병을 미룬 채 관망하는 태도를 취했다. 조조는 위기(백유)의 계책을 받아들여 관중 지방을 진무하고 동시에 관도에 방어시설을 짓기 시작하여 원소의 허창 공격에 대비했다.


서막

관도는 지리적으로 군사 요충지였다. 이곳은 황하의 도하지점인 연진과 가까워 한나라 도읍 허창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조조가 그 전략적 중요성을 깨달아 199년 가을 군대를 주둔해 요새를 쌓으려 준비하였다. 또 다른 야전군 집단들로서 백마에 유연, 연진에 우금(문칙),  견성에 정욱(중덕), 맹진에 하후돈(원양)의 부대가 주둔하였다. 동시에 조조는 장패(선고)에게 청주 지방에서 교란작전을 시작하게 하였다. 청주는 원소의 아들 원담(현사)이 다스리던 곳으로 조조의 동쪽 측면이 공격받는 상황을 막기 위해서였다.

200년 1월 유비(현덕)이 조조에게서 달아나 서주 지방에 기반을 마련했다. 조조는 신출귀몰한 전술로 북쪽 전선을 원소에게 노출한 채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유비의 반란을 처리하려 했다. 당시 조조의 장수들은 먼저 원소를 쳐야 한다고 했으나 조조는, "유비는 사람들 가운데 호걸이라 지금 치지 않으면 장래에 후환이 될 것이오. 원소가 큰뜻을 품었으나 우유부단해 쉽게 행동에 나서지 못하오"라고 했다. 조조가 신속히 진군해 유비를 격파고 관우(운장)을 사로잡았다. 조조가 유비를 공격할 때 원소의 참모 전풍이 조조가 허창을 비운 틈에 공격할 것을 조언했으나 원소는 아들이 아프다며 거절했다.

조조가 유비를 이겨 관도로 돌아올 때 유비는 조조를 상대로 전쟁을 재개하기를 원하던 원소에게 달아났다. 예전에 조조가 부재했을 때 공격할 것을 주장했던 원소의 참군(군사참모) 전풍은 기회가 이미 사라졌다며 작전에 반대했다. 그러나 원소는 전풍의 거듭된 충언을 뿌리치고 그를 하옥했다. 군대의 사기를 흐트린다는 죄목이었다. 얼마 뒤 원소의 주력부대가 황하 북쪽 여양에 있는 전진기지로 행군했다. 기병 1만을 포함해 11만 대군을 자랑했다.(소설에선 70만 대군으로 부풀려짐)

황하를 따라 벌어진 접전들

(1) 두씨진전투

[크게 알려진 전투 같지는 않습니다]


2월, 원소는 탐색전으로서 연진에 주둔한 우금을 공격했다. 우금이 그 땅을 굳건히 지켜내어 원소가 이기지 못했다. 뒤이어 우금은 악진 문겸과 합세해, 연진에서 황하 서남쪽을 따라 주둔한 원소의 5천 마보군(기병과 보병)의 별영[독립진지]들을 공략했다. 우금과 악진의 연합부대는 급 汲 땅까지 침공하고 황하를 건너 획가 獲嘉 땅을 공격했다. 전부 합쳐서, 그들은 약 30개소의 적진을 불사르고 수천명을 목베고 또한 수천명을 생포했으며 하무 何茂와 왕마 王摩를 포함한 20명 남짓한 장군들의 항복을 받았다.

조조는 우금에게 원무 原武에 주둔하게 명하여 거기서 우금은 두씨진 杜氏津에 주둔한 원소의 별영을 공격해 박살냈다. 두씨진은 허남성에 위치한 조조 진영의 최극단 지점이었다. 그리하여 우금은 비장군 裨將軍으로 승진하여 관도로 돌아와 조조를 수행했다. 조조 또한 유비를 상대로 성공적 전투를 치르고 돌아와 있었다.

[정사삼국지를 보면 우금열전에 두씨진전투를 언급했습니다.太祖初征袁紹,紹兵盛,禁原為先登。太祖壯之,乃遣步卒二千人,使禁將,守延津以拒紹,太祖引軍還官渡。劉備以徐州叛,太祖東征之。紹攻禁,禁堅守,紹不 能拔。復與樂進等將步騎五千,擊紹別營,從延津西南緣河至汲、獲嘉二縣,焚燒保聚三十餘屯,斬首獲生各數千,降紹將何茂、王摩等二十餘人。太祖復使禁別將屯原武,擊紹別營於杜氏津,破之。태조가 처음에 원소를 정벌할 때 원소 군대가 성대했으나 우금이 선봉에 서려 했다. 태조가 그를 장하게 여겨 보병 2천을 줘서 우금이 거느리게 하여 연지를 수비해 원소를 막도록 하였다. 태조가 군대를 이끌어 관도로 돌아가자 유비가 서주에서 배반해 태조가 동쪽으로 정벌했다. 원소가 우금을 공격했으나 우금이 견고히 수비해 원소가 함락치 못했다. 다시 악진 등과 함께 보병과 기병 5천을 거느려 원소의 별영을 공격해 연진으로부터 서남쪽으로 황하를 따라 급, 획가 두 고을에 이르기까지 30여 군데의 진지를 불사르고 참수와 포로가 각각 수천이었다. 항복한 원소의 장수들은 하무, 왕마 등 2십여 인이었다. 태조가 다시 우금을 따로 원무에 주둔케 하여 두씨진에 있는 원소의 별영을 공격해 격파했다.]

(2)백마전투

원소의 장군 안량이 황하를 건너 백마에서 조조의 요새를 포위공격했다.  4월에 참모 순욱의 조언을 귀담아들은 조조는 1개 부대를 이끌고 연진으로 진군했다. 이것은 조조가 황하를 건너 원소 진지를 공격하려 한다고 믿도록 원소를 속이기 위한 기만전술이었다. 계략에 빠진 원소는 여양에서 병력을 옮겨 조조의 공격에 대응하려 했다. 이 결과 백마를 포위한 안량은 강건너 여양으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 없게 됐다. 그러자 조조가 동쪽을 급습해 백마의 포위를 풀려 했다. 후속전투에서 안량은 관우에게 죽고 군대는 대패했다.

(3)연진전투

그뒤 조조는 그 요새를 포기하고 주둔부대를 남쪽으로 옮겼다. 이런 틈을 타서 원소의 장군 문추와 유비가 이끄는 6천 경기병들이 추격에 나섰다. 그러나 조조는 그 공격을 예상해 교란전술을 준비해둔 상태였다. 말들, 무기류, 기타 값진 물건들을 길가에 버리게 하였다. 원소 군사들은 탐욕에 눈이 멀어 대오를 벗어나 앞에 펄쳐진 물건들을 주워댔다. 그들이 물건들을 줍느라 정신이 나가 있을 때 기습을 위해 매복해둔, 조조의 6백 정예 기병들이 공격에 나섰다. 혼란 속에서 원소의 대장 문추가 죽고 유비는 달아났다. 관도에서 본격적 전투에 들어가기도 전에 비록 상대적으로 소규모 전투였지만 원소군대가 연패하고 맹장 두 명을 잃어 원소 군대의 사기가 크게 꺾였다.

양무 진군과 측면공격 시도

황하를 따라 벌어진 교전 뒤에 원소 군대는 관도 바로 북쪽 양무로 밀고들어와 흙으로 성채를 쌓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여 원소는 견성의 정욱 휘하의 700명이 지키는 보루를 간과하고 아울러 조조의 동쪽 측면을 공격할 기회를 날려버린 것 같다. 앞서 조조의 참모 정욱은 원소가 소수 병력이 지키는 그곳을 무시할 것이라 예측했었다. 전군을 양무에 집중하는 것을 걱정한, 원소의 종사 저수가  연진에 일부 부대를 주둔해 관도 공략이 잘되지 않을 경우를 대비하라 조언했다. 그러나 또 다시 원소는 조언을 무시했다. 저수는 절망에 빠진 채 질병을 핑계로 벗어나려 했으나 원소가 성을 내어 그를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 대신에 원소는 저수의 부하들을 빼앗아 곽도 (공칙)와 순우경(중간) 두 사람에게 나눠 배속했다.

원소는 그 군대를 재편성하고 유비에게 1개 부대를 줘 수도 허창 남쪽 20리에 지역으로 보내 그곳의 반란군을 지원하게 한다. 조조가 그 후방에서 벌어지는 사태에 걱정했으나 그의 조카 조인(자효)은 유비가 원소에게서 받은 새로운 부하들을 제대로 장악하지 못하는 걸 알아차렸다. 그래서 조조가 조인을 보내 반란을 진압하게 하였다. 조인이 성공해 반란군 두목 유벽을 죽이고 유비를 패주시켰다. 원소는 또한 한맹 韓猛을 남서쪽으로 보내 조조를 서쪽에서  끊어버리려 했다. 조인이 다시 활약해 한맹을 계락산 雞洛山에서 격파했다. 그뒤 원소는 다시는 조조 영내로 별동부대를 보낼 생각을 접었다.

양무에서 몇가지 전쟁계획이 원소에게 전달됐다. 조조 병사들의 군량이 바닥나는 걸 관찰한 원소의 참모 저수가, 조조의 결전을 피하여 소모전으로 돌입하는 게 적절하다고 원소에게 조언했다. 또 다른 참모 허유(자원)는 원소에게 조언하여 관도에서 전선을 유지하는 동시에 허창을 기습적으로 포위공격해 황제를 모실 걸 주장했다. 그러나 아마도 앞서 유비, 한맹 등의 별동부대가 아무 성과를 없지 못해서였는지, 원소는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은 똑바로 진격해 황제를 모시겠다 말했다. 이에 허유가 불만을 품었다.

관도 포위전

8월에 원소 군대는 양무로부터 서서히 남쪽으로 진격해 조조 군대와 참호전에 말려들어 양쪽 군대가 흙으로 만든 보루를 마주했다. 양쪽 군대는 각종 전쟁무기를 동원해 상대 진영을 괴롭혔다. 원소는 운제(Siege Ramp)와 높은 돈대를 만들어 그 위에서 조조 군대에서 화살를 퍼부었다. 이 때문에 조조 부하들은 방패를 들고 다녀야 했다. 결국 투석기로 돌덩이를 쏘아 날려 원소 군대의 사격 망루를 파괴했다. 원소는 또한 조조 요새 아래로 지하 터널을 파려 했으나 조조가 대응하는 참호를 파서 무산시켰다. 그뒤 어느 쪽도 상대를 이기지 못한 채 전선은 고착됐다.

머지 않아, 조조 군대는 보급물자 부족에 시달리기 시작해 조조는 원소를 유인해 더욱 깊숙히 후퇴해야 할지도 모를 궁지에 몰렸다. 조조의 일급 참모 순욱(문약)은 당시 허창을 수비하고 있었는데 조조에게 서신을 보내어 후퇴를 말렸다. 그는 옛날 초나라 한나라 간의 전투 사례를 들어 서신을 썼다.

'... 명공의 군수 보급이 모자라지만 초나라 한나라가 형양, 성고에서 싸운 상황보다 나쁘지는 않습니다. 그 당시 유방이나 항우나 아무도 먼저 후퇴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명공께서 적의 10분의 1의 병력으로 현 위치를 확보하고 원소의 목구멍을 틀어막아 벌써 반년이 지나도록 원소가 전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원소의 전력은 소모될 것이고 어떤 위기가 틀림없이 그에게 닥칠 것입니다. 지금은 비상한 전략을 써야 할 때입니다. 이 기회를 놓치셔선 안 됩니다.'

조조가 조언을 받아들여 끈질기게 수비했다. 9월 원소가 한맹을 파견해 고시 故市에 군수 물자를 비축하는 것을 순욱이 알렸다. 조조가 소규모 기병대를 서황 공명과 사환 史渙에게 줘 그곳을 타격하게 하였다. 그들이 성공하여 한맹을 패주시키고 원소의 보급선을 끊어버리고 군량 수송 수레들을 불살랐다. 이 공격 탓에 원소는 구호물자를 요청해야 했다.

오소 습격

10월 원소의 장군 손우경이 휘하 부대 1만을 거느리고 하북에서 대규모 비축식량 수송대열을 호송해 돌아왔다. 원소가 손우경에게 그 대열을 오소 烏巢로 호송해 간 뒤에 그곳을 지킬 걸 명했다. 오소는 관도에서 40리 떨어진 곳으로 한맹이 패주한 고시 故市에 가까웠다. 원소의 참모 저소는 오소는 중요한 보급기지이므로 경무장해서는 안 되며 장군 장기 蔣奇를 보내어 손우경 부대 둘레를 지키는 한편 만일에 있을 공격을 차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원소는 다시 한번 저수의 조언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얼마 뒤 원소의 다른 참모 허유가 예전에 원소가 그의 계책을 들어주지 않아 불만을 품은데다 평소 다투던 심배가 그의 아내를 체포하자 조조에게 망명했다. 그는 조조의 보급 부족을 알아차려 조조에게 오소가 원소를 궁지에 몰아넣을 약점이라고 깨우쳐줬다. 조조의 장군들은 이런 정보를 의심했다. 그러나 조조의 참모 순유와 가후(문화)는 조조에게 허유의 책략을 실행할 걸 역설했다. 그리하여 그날밤 조조가 5천명의 보명과 기병들을 이끌고 오소를 기습하는 한편, 조홍(자렴)과 순유를 관도의 본영에 남겨 지키게 하였다. 조조가 이끄는 부대를 원소의 증원부대로 위장해 오소를 공격했다. 순우경의 초기 대응은 궤멸돼 그는 요새로 후퇴하여 지키려 했으나 조조가 공격해서 불을 질렀다.

오소가 공격받고 있다는 급보가 원소 진영에 전해지자 용맹한 장군 장합(준예)은 증원군을 오소로 보내어 이번 전쟁의 운명이 걸린 보급물자들을 구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참모 곽도는 반대로 주장했다. 관도에 있는 조조 진지를 공격하면 조조가 오소 공격을 포기할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원소가 곽도의 계책을 채택하여 장합과 고람에게 주력부대를 이끌고 관도의 주력기지를 공격하게 한 반면, 오소에는 소규모 기병대를 증파하는 데 그쳤다.

믿기 어려운 허장성세를 부려 조조는 원소의 증원병력을 막기 위해 군사들을 나눠달라는 간청을 무시하였다. 이에 따라 그의 부하들은 죽을 각오로 싸워야 했다. 오소 습격은 대성공이어서 원소군대의 사상자가 1천을 넘었다. 원소의 장군들인 여위황, 한거자, 휴원진, 조예가 목베이고 순우경이 악진에게 사로잡혀 코가 잘렸다. 오소에 있던 원소의 군량 대부분이 불살라졌다.

새벽까지 오소는 아비규환을 이뤄 원소 군대의 사기는 군량손실에 따라 급격히 바닥을 쳤다. 조조는 또한 죽은 사람들의 코를 잘라 소와 말의 입술과 섞어 원소 부하들에게 보여줘 공포심을 불러일으켰다.

한편 관도에서 장합과 고람이 지휘한 원소 군대는 적의 방어선을 돌파하는 데 실패했다. 오소의 패배 소식을 들은데다 곽도가 그들을 모함한다는 소문을 들은 장합과 고람은 조홍에게 항복하고 무장해제했다. 원소 군대의 사기는 철저히 무너지고 조조 군대는 총공격할 기회를 잡았다. 원소의 정예병력은 격파되고 대량의 보급물자를 조조가 노획했다. 원소는 황하를 건너 북쪽으로 겨우 800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달아났다. 원소는 부하장수 장의거의 진지에 이르러 패잔병들을 규합했다.

원소 부하들 가운데 일부는 그때 황하를 건너지 못하여 조조에게 잡혔는데 그 가운데 원소의 참모 저수도 있었다. 이들 가운데 일부가 거짓을 항복해 기회를 봐서 달아나려 하자 조조가 이들을 생매장했다. 황제에게 글을 올려 승리를 자랑하면서 조조는 적군 7만을 죽였다고 주장했다.

결과

관도대전에서 조조의 승리는 그와 원소 사이의 권력투쟁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 원소는 2년 뒤 죽으면서 그의 막내아들 원상 (현보)을 후계자로 지명했다. 장남 원담(현사)은 이러한 승계에 분노하여 막내동생과 교전했다. 이 결과 원소 군대들 사이에 내란이 일어났다. 원소 아래 있던 재주있는 참모들과 장수들도 양쪽으로 갈라져 한쪽은 원상을 지지하고 다른 한쪽은 원담을 지지했다.

이틈에 조조는 하북 지방에 대한 공격 기회를 잡아 원씨의 군대를 격파하는 데 성공했다. 원담은 조조에게 투항했다가 다시 반란을 일으켜 결국 포위받아 죽었다. 그뒤 원상 군대가 패전을 거듭해 북쪽으로 두째 아들 원희(현혁)에게 달아났다.

조조 군대가 그들을 추격해 그들 연합군을 백랑산 전투에서 격파했다. 결국 그들 형제는 207년 망명 중에 살해당했다. 그때에 이르러 북부 중국 대부분은 조조의 통치 아래 통일돼 조조는 남쪽으로 주의를 돌리기 시작했다.

유산과 분석

오랜 세월을 두고 관도에서 거둔 조조의 인상적 승리는, 그의 생애의 절정으로 역사가들이나 군사가들 모두 그의 승리를 본받고자 여러모로 분석했다.

역사서 «자치통감»의 저자 사마광 군실은, 원소가 너그럽고 우아하고 유능한 반면 고집불통에다 자만하고 때때로 합리적 충고를 무시했다고 언급했다. 이러한 부정적 특성들이 그의 패배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더 최근에는 중국의 민족주의자들이나 공산주의자들이나 이 전투를 골라, 여러 수준의 객관성을 가지고 나름대로 해석했다.

마오쩌뚱

마오쩌뚱(모택동)은 전략적 후퇴에 관한 그의 저술에서 관도전투를 초나라와 한나라 사이의 성고전투, 후한을 세운 유수와 왕읍 사이의 곤양전투, 조조와 연합군 사이의 적벽전투, 유비와 오나라 사이의 이릉전투, 부견과 동진 사이의 비수전투와 함께 그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인용했다. 이 모든 전투에서 마오쩌뚱은 "서로 맞서는 양쪽 진영은 전력에서 같지 않았고 약한 쪽이 먼저 일보 후퇴하여 강한 쪽을 지연전술을 통하여 꼼짝 못하게 만든 뒤 이겼다"라고 적었다. 마오쩌뚱의 저술이 관도전투에 대한 일부 관심을 불러 많은 저작들에서 모택동사상의 관점으로 그 전투를 분석했다.  모택동사상에 따른 해석에서, 원소의 심각한 판단착오들에 주의하면서, 약한 군대가 끈질기게 기다릴 수 있다면 강한 군대는 치명적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는 것을 옹호한다.

이러한 공산주의자들의 해석은 원소를 대지주-관료계급의 대표적 인물로 묘사하고 조조를 중간의 소지주 계층으로 묘사한다. 관도전투는 계급갈등의 산물로서 원소의 몰락은 불가피했다는 것이다.

민족주의자들은 전통적 중국 역사관을 따라 그 전투를, 당시 상황이나 관련 전술보다는  인간 성품의 관점에서 판단했다. 예를 들어 조조는 유능하고 단호하고 멀리 내다본 반면, 원소는 평범하고 굼뜨고 오만한데다 사람을 적절히 쓸 줄 몰랐다고 조롱받았다.

역사가 칼 레반은 조조의 승리를 단일한 전략적 결정에 따른 것으로 본다. 그것은 방어자의 위치선정이다. 조조가 관도를 그가 저항할 수 있는 지점으로 고른 건, 지형분석, 병참, 원소에 대한 전술 사이의 관련성을 조조가 뛰어나게 이해한 결과라고 칼 레반은 역설한다. 황하에 걸친 방어선을 포기한 조조의 결정은 병참 문제 때문이었다. 조조가 원소를 남쪽 깊숙히 관도에까지 유인하여 원소의 보급선을 어쩔 수 없이 길게 늘어뜨려 결국 원소의 불리한 병참 문제를 파고들어 결정적 승리를 거뒀다.

[영어위키와 중문위키, 정사삼국지 등을 번역해봤습니다.]

덧글

  • asianote 2009/09/24 18:23 # 답글

    조조가 가장 빛났던 시기는 207년 전후 인 듯 합니다. 북방의 통일을 이룩하고 승상에 취임했으며 모든 군벌들을 멸망시킬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208년 제갈량이 등장하면서부터...
  • 뽀도르 2009/09/24 18:29 #

    하긴 그무렵 적벽대전을 앞두고 조조가 단가행을 읊던 모습이 젤 멋지기도 하지요.
  • 시무언 2009/09/25 00:10 # 삭제 답글

    하지만 조조도 적벽에서 지형과 여러가지 문제로 패배하게 되지요.

    영원한 승리자는 없다는 것일지도
  • 뽀도르 2009/09/25 10:14 #

    적벽대전을 보면, 전진의 황제 부견이 천하통일을 눈앞에 두고 대패한 비수 싸움이 생각나더군요. 그래도 부견은 그 패배의 후유증을 벗어나지 못해 결국 망했지만 조조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으니...
  • 시무언 2009/09/25 12:13 # 삭제 답글

    그래서 결국엔 천하통일을 못했고 훗날 간웅 소리를 듣게 되었으니 조조 본인은 저 세상에서 "캬~아깝게스리~"이랬을지도 모르죠.
  • 뽀도르 2009/09/25 17:29 #

    조비가 찬탈하지 않았으면 조조가 그렇게까지 욕을 먹지 않았을 것이란 시각도 있지요. 조조는 황제 자리를 극구 사양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천하통일도 못해보고 황제에 즉위도 못하고 지하에서 좀 원통한 마음이 들 만도 하군요.
  • 시무언 2009/09/26 00:07 # 삭제 답글

    분명 저승에서 "유비 ㅅㅂㄻ"를 외치고 있을거겠죠(...)
  • 뽀도르 2009/09/26 09:30 #

    ㅋㅋ 유비는 헌제가 쫓겨났을 때 헌제를 찾아 복위시킬 생각은 않고 냉큼 황제가 된 감도 있으니 -_-;
  • 시무언 2009/09/26 13:36 # 삭제 답글

    유비 입장에선 헌제가 죽은줄 알았을지도 모르죠. 여하간 조조의 일생에서 중요한때마다 엿먹인건 유비가 유일할듯 합니다.

    심지어는 창천항로에서도 한중전때 조조가 군사를 물리는데 실제적으로 피해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비에게 철퇴를 맞았다고 분노하지요.
  • 뽀도르 2009/09/26 14:01 #

    평생에 걸친 숙적이군요.
  • 시무언 2009/09/26 14:59 # 삭제 답글

    위빠들은 그래서 유비가 저항만 안했어도 난세는 금방 끝났을거라고 유비를 대역죄인 취급하죠
  • 뽀도르 2009/09/26 15:56 #

    조조는 난세의 간웅이고 유비는 난세의 대웅... 大熊 큰곰일런지도 -_-_;;; 계속 말아먹고도 재기하는 것 보면 곰 같은 맷집을...
  • 이훈 2009/11/27 22:57 # 삭제 답글

    유비가 헌제를 복위 시키다니요? 헌제는 조조에 의해 폐위돼 위(魏)나라에 있었고, 유비는 촉(蜀)에 있었지 않았습니까? 뭘,알고나 하는 말인지 모르겠네....삼국지나 읽어 보셨수? 사람의 댓글을 생각나는 대로 아무렇게나 달지 마세요. 유비가 헌제를 복위시키다니? 말도 안되는 소릴...하지만,유비는 명목상으로라도 漢王朝의 부흥을 위해 국호도 蜀漢으로 정하죠.
  • 뽀도르 2009/11/28 00:21 #

    유비의 헌제 복위 운운은 순전히 제 생각이 아니라 그런 견해가 좀 있지요. 현실적으로는 복위시킬 수 없었겠지만 명분상으로 문제 삼는 사람들이 있지요. 장정일 등이 지은 <삼국지 해제>에서도 그런 견해가 나옵니다.
  • 우문칙 2010/04/25 01:39 # 삭제

    국호를 어디를 촉한으로 정합니까. 漢이라고 정했죠.
    물론 위나 오에서는 그냥 촉이라 부르긴 했지만.
  • 이훈 2009/11/27 23:02 # 삭제 답글

    나 관중이 지은 <삼국지 연의>는 촉한에 정통(正統)을 두어 쓰여진 말 그대로 소설책이죠(그러나 진실이 70%, 허구가 30%).
    그러나 역사학자들의 생각을 들어보면 유비에 비해 조조가 훨씬 나은 인물 이라고 합니다.
    조조는 <삼국지 연의>때문에 엄청난 피해를 본 인물 이라는 거죠.
    사실상,조조는 중국 역사상 열손가락 안에 드는 위대한 인물 입니다.
  • 뽀도르 2009/11/28 00:21 #

    조조에 대해서는 워낙 평가가 극과 극을 달리지요.
  • 우문칙 2010/04/25 01:39 # 삭제

    그 역사학자들이 누군지 궁금하군요.
  • 시무언 2009/11/28 01:29 # 삭제 답글

    유비는 적어도 대학살은 하지 않았죠
  • 뽀도르 2009/11/28 10:19 #

    유비가 개인적 보복사례는 보입니다만 적어도 대학살만은 안 했지요.
  • 시무언 2009/11/28 01:33 # 삭제 답글

    그리고 조조는 연의 이전부터 까였습니다. 가장 이른 예로는 남북조 시대의 석륵으로 그는 "나는 조조처럼 사람을 속이진 않겠다"라고 얘기했고 연의 이전에 나온 소설 삼국지 평화에선 조조가 극악무도한 악당으로 나오지요. 차라리 연의가 조조를 오히려 복권시킨 편입니다
  • 뽀도르 2009/11/28 10:20 #

    사마 씨의 진나라 이후의 기나긴 혼란의 책임을 조조에게 묻는 학자도 있지요. 조조 혼자 뒤집어 쓰기엔 억울하겠지만 ...
  • 시무언 2009/11/28 11:49 # 삭제 답글

    시대가 시대다보니 개인적 보복사례는 유비든 조조든 다 있긴 한데 조조쪽이 좀 눈에 띄게 일을 많이 벌인 편이죠(유비야...뭐 수염적다고 한 사람에게 원한 품어서 죽였다던가, 독우를 패버렸다거나-_-). 서주 대학살말고도 원소군 8만명 생매장이라거나 젊을적부터 도와준 누규를 사소한 트집 잡아 죽였다던가.

    그래도 남북조 시대의 혼란을 조조에게 뒤집어 씌우는건 확실히 좀 그런듯합니다. 사마씨도 있는데...
  • 뽀도르 2009/11/28 12:45 #

    ㅋㅋ 유비가 수염 적다고 원한 품었다가 죽인 이야기는 예전에 읽어보니 좀 웃기기도 하고... 조조에 비할 바는 아니지요.
  • 시무언 2009/11/28 14:30 # 삭제 답글

    뭐 그래도 유비는 손권이나 조조에 비하면 그나마 얌전(...)한 편이었죠.

    하지만 저 셋이 아무리 막장이라도 동탁이나 원술 따라가겠습니까(...)
  • 뽀도르 2009/12/03 10:44 #

    동탁이나 원술이 후세에게 이래서는 안 된다는 본보기가 됐을 수도...
  • 후레쉬 2009/12/02 21:22 # 삭제 답글

    좋은글 잘 읽고 갑니다^^

    퍼갈게욥~!
  • 뽀도르 2009/12/03 10:44 #

  • 용가리통뼈 2009/12/03 03:34 # 삭제 답글

    좋은글 읽고 퍼갑니다.^^
    관도 전투에서의 조조군의 위용과 전략등을 각 전투별로 알기 쉽게 근거를 들어 설명해놓으셨네요. 사실 요즘들어 삼국지를 다시 읽기 시작했는데.. <삼국지연의>자체가 촉한의 정통성으로서 유비를 좋게 묘사하고 있으니... 개인적으로 천운과 천시가 닿아서 조조가 공명을 만났다면...이란 생각이 듭니다. 조조는 공명의 지략을 쓸만한 용기와 배짱이 있었고 또한 물량(군비와 군사)가 얼마든지 있었기에.. 그랬다면 역사는 바뀌었겠죠.. 물론 역사에서 만약이란 의미가 없겠지만요... 짧은 삼국지 지식으로 여러분의 눈을 어지럽힌점 죄송합니다 ^^
  • 뽀도르 2009/12/03 10:47 #

    감사합니다.
  • 다같이 2009/12/03 08:27 # 삭제 답글

    퍼갈께요
  • 뽀도르 2009/12/03 10:47 #

  • 라면의추억 2009/12/04 00:17 # 삭제 답글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퍼갈께요~~!!
  • 뽀도르 2009/12/04 11:38 #

    넵 도움이 된다니 다행입니다.
  • 패군 2009/12/04 02:41 # 삭제 답글

    퍼갈게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 뽀도르 2009/12/04 11:38 #

    저도 감사합니다.
  • 데빌 2009/12/04 12:04 # 삭제 답글

    글에 있는 내용좀 퍼갈게요 감사합니다
  • 뽀도르 2009/12/04 12:07 #

    넵 .. 그런데 요새 관도대전을 많이 퍼가는군요. 아마 어디에 링크라도 된듯...
  • 삼국지 2009/12/04 17:43 # 삭제 답글

    삼국지w 라는 웹게임이 있어요..
    거기서 이벤트 가 열렸는데 관도대전에 나온 장수들 및 활약상 등등을
    적어서 올리는 것이라. 많이 퍼가고 있을꺼예요 ^^
    저도 퍼갈께요
  • 뽀도르 2009/12/04 18:06 #

    아 그렇군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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