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사삼국지] 하후돈에 대한 평가 원문삼국지 原文三國志

하후돈 夏侯惇

하후돈에 대한 평가 (영문 위키피디아)

하후돈은 강직하지만 난폭하고, 친구와 가족에겐 친절하고 충직하지만 적들에겐 무자비하고 무정하다고 사람들은 말했다. 그를 조조의 오른팔이라 했으며, 종종 그의 주공과 수레를 같이 탔는데 이건 조조의 개인 경호원인 전위나 허저도 못 누린 특권이다.

그러나 군 지휘관으로 하후돈의 불같은 성미는 종종 도움이 되기보다 방해가 됐다. 그의 용맹이야 물을 필요 없지만, 그의 군사적 성공은 극히 드물었다(few and far between). 박망파 전투 博望之戰에서 하후돈 휘하의 조조 군이 유비를 가까운 계곡으로 추격하다가 기습을 받아 수천의 목숨을 잃었다. 화공이 시작되고 그 와중에 조조의 정예 병력 다수가 살해 당했다. 또 다른 예를 보면, 하후돈이 자기 진영 안에서 배신자들에게 사로잡혀 인질이 된 적이 있다. 그의 부하들이 협상을 거부하고 공격해서 인질범들을 도륙해서 그를 구출했다.

태수 太守가 되어서 하후돈은 천직을 발견했다. 태수수 太壽水에 제방을 쌓고 물이 넘치는 땅에 백성들이 벼를 심도록 격려했으며 몸소 벼 심기에도 참여했다. 부하들에게 재물을 나눠주고 자신은 조금만 가지는 습관 덕에 관대하다는 명성을 얻었다. 이래서 그의 부하들에게 매우 사랑 받았다.

그러나 그의 성급함은 유명했다. 한쪽 눈을 잃고서 '장님 하후 씨'로 부르는 걸 알고 그 별명을 싫어해서 , 삼국연의에 따르면 자기 얼굴을 볼 때마다 거울을 내동댕이쳤다고 한다.

그의 성질보다 더 유명한 건 그의 충성심이다. 어느 일화에 따르면, 조조가 위왕이 되자 그 장군들에게 작위를 내렸으나 하후돈에게만은 위나라의 작위가 아닌 한나라 황제로부터의 작위를 내렸다. 하후돈이 이유를 묻자 조조는 위대한 관리는 위대한 땅에 속해야 하는데 위나라 땅은 하후돈의 가치에 걸맞을 만큼 크지 못하다고 설명했다. 감동한 하후돈이 한나라 작위를 거부하고 위나라 작위를 대신 요구하여서 한나라 황제에 대한 충성심보다는 그 주공에 대한 충성심이 큰 걸 보여줬다.

삼국지 위서 하후돈 전

夏侯惇字元讓,沛國譙人,夏侯嬰之後也。年十四,就師學,人有辱其師者,惇殺之,由是以烈氣聞。太祖初起,惇常為裨將,從征伐。太祖行奮武將軍,以惇為司馬,別屯白馬,遷折衝校尉,領東郡太守。太祖征陶謙,留惇守濮陽。張邈叛迎呂布,太祖家在鄄城,惇輕軍往赴,適與布會,交戰。

하후돈, 자 원양, 패국 초 사람으로 하후영의 후예다. 14세에, 스승에게 배우다 다른 이가 스승을 모욕하자 하후돈이 죽여서 그 사나운 기세로 세상에 알려졌다. 태조(조조)가 처음 병사를 일으키자 하후돈이 늘 비장으로 종군했다. 태조가 분무장군이 되자 돈을 사마 司馬로 임명, 따로 백마에 주둔시키고 다시 절충교위로 바꿔 동군태수를 맡겼다. 태조가 도겸을 정벌할 때 하후돈을 남겨 복양을 수비했다. 장막이 배반, 여포를 끌어들였는데 태조 식구가 견성에 있으므로 하후돈이 경기병을 이끌고 가다 여포와 마주쳐 교전했다.

布退還,遂入濮陽,襲得惇軍輜重。遣將偽降,共執持惇,責以寶貨,惇軍中震恐。惇將韓浩乃勒兵屯惇營門,召軍吏諸將,皆案甲當部不得動,諸營乃定。遂詣惇所,叱持質者曰:「汝等凶逆,乃敢執劫大將軍,復慾望生邪!且吾受命討賊,寧能以一將軍之故,而縱汝乎?」因涕泣謂惇曰:「當奈國法何!」促召兵擊持質者。持質者惶遽叩頭,言「我但欲乞資用去耳」!浩數責,皆斬之。惇既免,太祖聞之,謂浩曰:「卿此可為萬世法。」乃著令,自今已後有持質者,皆當並擊,勿顧質。由是劫質者遂絕。( 孫盛曰:案光武紀,建武九年,盜劫陰貴人母弟,吏以不得拘質迫盜,盜遂殺之也。然則合擊者,乃古制也。自安、順已降,政教陵遲,勢質不避王公,而有司莫能遵奉國憲者,浩始復斬之,故魏武嘉焉。)

여포가 물러나서 복양을 습격, 하후돈의 군수물자를 빼앗았다. 여포가 보낸 부장이 거짓으로 항복, 여럿이 함께 하후돈을 사로잡아 인질로 삼고 금은보화를 요구하자 하후돈의 군중이 두려움에 떨었다. 하후돈의 부장 한호가 병력을 이끌고 하후돈의 영문 앞으로 가서 여러 관리와 장수를 소집, 무장한 채 부하들을 거느리고 동요치 않게 하여 여러 군영이 안정됐다. 곧 하후돈의 처소로 가서 인질로 잡은 자들을 꾸짖었다.

"너희가 흉악하게 감히 대장군을 위협, 살기를 바라냐! 내가 도적을 토벌하란 명을 받들지, 어찌 장군 하나 잡혔다고 너희 요구를 들어줄 것 같냐?"

그리고 하후돈에게 울며 말했다.

"국법인데 어찌하겠습니까?"

병사들에게 인질범들을 공격하라 다그쳤다. 인질범들이 놀라서 머리를 조아려 말했다.

"저희는 다만 재물을 얻어 가려 했을 뿐이오."

한호가 거듭 꾸짖고 모두가 달려들어 베었다. 하후돈이 풀려난 걸 태조가 듣고 한호에게 말했다.

"그대는 만세의 모범이오."

규정을 정해 그때 이후 인질범은 모두 함께 죽이고 인질은 돌보지 않게 했다. 이로부터 인질범이 사라졌다.

[주석: 손성이 말하길, <광무기>에 따르면 건무 9년, 어느 도적이 귀인의 모친의 동생을 위협했는데 관리가 인질 구출과 도적 체포를 할 수 없자 도적이 결국 죽였다. 그래서 함께 치는 건 옛날부터의 제도다. 안, 순 시기 이후 정교가 무너져 왕공을 가리지 않고 인질로 잡고 관리는 아무도 국법을 존중하지 않은 걸, 한호가 다시 참한 것이므로 위나라 무제(조조)가 칭찬한 것이다.]

太祖自徐州還,惇從征呂布,為流矢所中,傷左目。( 魏略曰:時夏侯淵與惇俱為將軍,軍中號惇為盲夏侯。惇惡之,照鏡恚怒,輒撲鏡於地。) 復領陳留、濟陰太守,加建武將軍,封高安鄉侯。時大旱,蝗蟲起,惇乃斷太壽水作陂,身自負土,率將士勸種稻,民賴其利。轉領河南尹。太祖平河北,為大將軍后拒。鄴破,遷伏波將軍,領尹如故,使得以便宜從事,不拘科制。建安十二年,錄惇前後功,增封邑千八百戶,並前二千五百戶。二十一年,從征孫權還,使惇都督二十六軍,留居巢。賜伎樂名倡,令曰:「魏絳以和戎之功,猶受金石之樂,況將軍乎!」二十四年,太祖軍於摩陂,召惇常與同載,特見親重,出入臥內,諸將莫得比也。

태조가 서주에서 돌아오자 하후돈이 여포 정벌에 따라갔다가 유시에 맞아 왼눈을 다쳤다. [주석: <위략>에 따르면, 그때 하후연이 하후돈과 함께 장군이므로, 군중에서 하후돈을 '맹하후(눈먼 하후 씨)'로 부르자 하후돈이 싫어하고 거울을 비춰보고 화를 내더니 갑자기 거울을 땅에 집어던졌다.] 태조가 하후돈을 다시 진류와 제음의 태수로 맡기고 건무장군을 더하고 고안향후에 봉했다. 그때 큰 가뭄이 들어 메뚜기가 창궐하자 하후돈이 태수수를 막아 연못을 만드는데 스스로 흙을 지고 장사를 거느리고 볍씨 심기를 권해서 백성들이 그 덕을 봤다. 다시 하남윤을 맡았다. 태조가 하북을 평정할 때 대장군으로 삼아 후방을 맡겼다. 복양을 함락한 뒤 복파장군이 되고 다시 하남윤을 맡고서 편의에 맞춰 일을 처리하면서 규정에 구속되지 않았다. 건안 12년에 하후돈의 여러 공적을 살펴 식읍 1800 호를 더하고 그전의 2500 호도 그대로 뒀다. 21년 태조가 손권 정벌에서 돌아와 하후돈에게 26 군 軍을 맡기고 거소에 머물게 했다. 태조가 하후돈에게 기생과 악사, 명창을 내리면서 명령하였다.

"위강이 화융의 공으로도 금석의 음악을 받았는데 하물며 장군에게 있어서야!"

건안 24년 태조 군이 마파에 있을 때 태조가 하후돈을 불러서 늘 함께 타고 특별히 가까이하는 게 대단하고, 침실에도 출입케 하니, 다른 여러 장수 가운데 이럴 수 있는 자가 없었다.

拜前將軍,( 魏書曰:時諸將皆受魏官號,惇獨漢官,乃上疏自陳不當不臣之禮。太祖曰:「吾聞太上師臣,其次友臣。夫臣者,貴德之人也,區區之魏,而臣足以屈君乎?」惇固請,乃拜為前將軍。) 督諸軍還壽春,徙屯召陵。文帝即王位,拜惇大將軍,數月薨。

전장군에 제수했다. [주석: <위서>에 따르면, 그때 여러 장수 모두 위나라 왕 이름으로 작위를 받았으나 하후돈이 홀로 한나라 황제 이름의 작위를 받게 되자 이에 상소하여서 스스로 신하답지 못한 걸 감당할 수 없다 말하였다. 태조가 "내가 듣자니 가장 좋은 건 스승 같은 신하요 다음이 친구 같은 신하라 했소. 무릇 신하란 덕을 귀히 여기는 사람인데 구차한 위나라 작위로 그대가 주군을 섬길 만하겠소?"라고 하였다. 그러나 하후돈이 계속 고집해서 전장군에 제수됐다.] 여러 군대를 다스리고 수춘으로 돌아가 소릉에 옮겨서 주둔했다. 문제 [조비]가 즉위하자 돈을 대장군에 제수했으나 몇달 만에 죽었다.

惇雖在軍旅,親迎師受業。性清儉,有餘財輒以分施,不足資之於官,不治產業。諡曰忠侯。子充嗣。帝追思惇功,欲使子孫畢侯,分惇邑千戶,賜惇七子二孫爵皆關內侯。惇弟廉及子楙素自封列侯。初,太祖以女妻楙,即清河公主也。楙歷位侍中尚書、安西鎮東將軍,假節。( 魏略曰:楙字子林,惇中子也。文帝少與楙親,及即位,以為安西將軍、持節,承夏侯淵處都督關中。楙性無武略,而好治生。至太和二年,明帝西征,人有白楙者,遂召還為尚書。楙在西時,多畜伎妾,公主由此與楙不和。其後群弟不遵禮度,楙數切責,弟懼見治,乃共構楙以誹謗,令主奏之,有詔收楙。帝意欲殺之,以問長水校尉京兆段默,默以為「此必清河公主與楙不睦,出於譖構,冀不推實耳。且伏波與先帝有定天下之功,宜加三思」。帝意解,曰:「吾亦以為然。」乃發詔推問為公主作表者,果其群弟子臧、子江所構也。) 充薨,子廙嗣。廙薨,子劭嗣。( 晉陽秋曰:泰始二年,高安鄉侯夏侯佐卒,惇之孫也,嗣絕。詔曰:「惇,魏之元功,勛書竹帛。昔庭堅不祀,猶或悼之,況朕受禪於魏,而可以忘其功臣哉!宜擇惇近屬劭封之。」)


하후돈이 군을 이끌고 나가서도 친히 스승을 모셔 수업을 받았다. 성미가 청렴하고 남는 재물은 나눠주고 모자라면 관에서 얻어쓰고 재산을 따로 모으지 않았다. 시호를 일충후로 하였다. 아들 하후충이 계승했다. 황제가 하후돈의 공적을 생각하여 자손들을 모두 열후로 삼고자 하후돈의 식읍 1천 호를 나눠서 하후돈의 일곱 아들과 두 손자에게 하사하고 모두 관내후로 삼았다. 하후돈의 아우 하후겸과 아들 하후무는 원래 스스로 열후에 봉해졌다. 원래 태조가 그 딸을 하후무에게 시집 보내려 했으니 바로 청하공주다. 하후무가 시중상서, 안서진동장군 가절을 역임했다.

[주석: <위략>에 따르면, 하후무는 하후돈의 둘째 아들이다. 문제가 어려서 하후무와 친해서 즉위하자 안서장군 지절로 삼아 하후연이 다스리던 관중을 이어받게 하였다. 하후무가 천성이 장수의 지략이 없고 치생(생활의 방도)를 좋아했다. 태화 2년에 이르러 명제가 서쪽을 정벌할 때 누군가 하후무를 고발해서 불러서 상서로 삼았다. 하후무가 서쪽에 있을 때 축첩을 많이해서 공주가 이 때문에 하후무와 불화했다. 그후 여러 아우가 예법을 준수하지 않자 하후무가 수차례 질책하자 아우들이 벌 받을까 두려워서 함께 하후무를 비방하고 글을 올리자 조서를 내려서 하후무를 거둔 것이다. 황제가 그를 죽이려고 장수교위 경조 사람 단묵에게 묻자 단묵이 '이것은 필시 청하공주와 하후무가 불화해서 모함을 받은 것이니 실상을 따지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또 복파장군(하후돈)은 선제(조조)와 함께 천하를 평정한 곳이 있으니 거듭 생각하셔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황제가 이해하고 "나 역시 그리 생각하오."라 말하고 조서를 내어 공주를 위해 표를 올린 자를 추문케 하자 과연 여러 아우의 아들 하후장, 하후강이 음해한 것이었다.]

하후충이 죽자 아들 하후이가 잇고 하후이가 죽자 아들 하후초가 이었다.

[주석: <진양추>에 따르면, 태시 2년 고안향후 하후좌가 죽었는데, 하후돈의 손자로서, 자손이 끊긴 것이다. (진나라 황제가) 조서로 이르길, "하후돈은 위나라의 원훈공신으로 그 공훈을 죽백(대와 비단)에 남겼소. 예전에 정견이 죽어서 제사를 못올리자 도리어 누군가 슬퍼하였거늘 하물며 짐이 위나라에게 선양을 받았는데 그 공신을 잊을 수 있겠소! 마땅히 하후돈의 가까운 친척을 골라 이어서 봉할 것이오."]

덧글

  • nighthammer 2009/08/10 16:43 # 답글

    아니 이거슨 조조에 대한 믿음으로 대장군이 된 하후목사님 아니십니까.(...사실, 그것만 있는 건 아니지만.)
  • 뽀도르 2009/08/11 09:21 #

    ㅋㅋ 배신이 난무하던 시절, 충성심이 저토록 강한 것도 대단한 값어치를 했겠지요.
  • 시무언 2009/08/11 12:54 # 삭제 답글

    조조측의 관우랄까...라지만 관우와는 달리 군공이 약하군요(...)

    제갈공명 와룡전이라는 게임에서 보면 하후돈이 통솔이 유비급이고(15가 최대인데 6) 정치가 공융이랑 동급이더랍니다(10/15)-_-
  • 뽀도르 2009/08/11 13:04 #

    차라리 문신으로 전업했어도 대성했겠군요.
  • 시무언 2009/08/12 14:41 # 삭제 답글

    조조가 마냥 능력만 보고 사람 뽑은건 아니라는 증거이기도 하고...

    벼농사에 능했던 하후돈이라고 행보관이라고 놀리기도 하지요
  • 뽀도르 2009/08/12 15:43 #

    크크 조조가 장려한 둔전 제도에 적합하군요
  • 조조 2009/12/23 16:28 # 삭제 답글

    조조가 나쁜거라뇨 그렇게 따지고보면 유비는 병1신이죠 황충있는 장소에서 실제역사에서도
    하는 말이 뭔지나 아시나요? 실제 젊은장수들을 동용할때마다! 황충있는 장소에서
    늟은장수가 많아서 걱정이였거늘.. 이러면서 황충을 무시합니다
    황충:유비님이 변하셔서... 하면서 하후연을 죽여서 그공을 얻고나서 하후돈에게 개죽음당한뒤
    유비가 그냥 대충~ 무덤해주고 그냥가거든요 무슨개같은소리를하심
    그리고 실제 하후돈이 얼마나 강했는데요 나관중ㅅㅂ놈이 위나라만 ㅄ로 만들었죠;
    하지만 나관중이 나쁜게아니라 그걸믿는 사람들이 찐따들;
  • 뽀도르 2009/12/24 10:11 #

    소설은 소설일 뿐이지요. 소설에서 위나라가 많이 미움 받았지요 -_-;
  • 관우 2009/12/27 22:10 # 삭제 답글

    전관우를 좋아해요 이유는 정사든 소설이든 그레도 최고의 충신이였죠
    처음에 정사읽고 실망할줄알았는데 촉나라자체는 실망해도 관우는 그레도 충신이죠
    조조가 부귀영화를 해주고 금과 여자 돈 모두 주어도 배신안했던 관우죠
    162년 호랑이띠 이며 힘도 강했다고 합니다 근데 실제로 하후돈이 눈 두쪽다 안보이게 돼지않나요?
    장님이되여 아들만 바라보면서 살았다는데 두쪽 다안보이게 된네요 충격;
    한쪽눈을 독화살로 맞아서 그런가?? 두쪽다안보여서 하후돈 완전불쌍해요;
    그레서 공이없는듯;
  • 뽀도르 2009/12/28 09:41 #

    관우는 충과 의의 화신이죠. 나중에는 신으로까지 추앙 받게 됐으니...
  • 관우 2009/12/27 22:14 # 삭제 답글

    그리고 하후연이랑 조인이 최고의 위나라 장수였죠.
    근데 전개인적으로 하후연은 싫어해요;; 조인은좋은데;
    근데 위나라가 사마염에게 망하게 되죠 전그때 사마염싫어했는데 다시보니깐
    진삼국무쌍(게임)도 그렇고 사마의 대단하더라고요
    그리고 댓글읽어보니 조조님말씀 보니깐 제갈량이 제일심해요. 비를내리게해;
    이건 우상숭배를 하게만들어서 신이 될려는 제갈량의 음모도아니고;
    근데 정사에서도 유비는 덕으로 살았다는데. 조조는 뭐라할까 정사에서도 잔인한면이
    있다고 했어요 무서운 성격. 근데 그때 당시에는 무서운 잔인해야 살수있는 거곘죠
    솔직히 삼국시대 자체가 잔인한거죠 칼과 창으로 얼굴을 ..베어야 하니..막 전쟁하면
    얼굴 날라가고 난리 났을듯;
  • 뽀도르 2009/12/28 09:41 #

    수많은 백성이 전란으로 목숨을 잃은 잔인한 시대였죠.
  • 새싹 2011/06/11 08:30 # 삭제 답글

    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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