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염병의 역사] 유럽을 강타한 흑사병 The Black Death (2) 역사 잡설

맬서스적 위기

게다가 많은 사가들은 흑사병의 원인을 놓고 다른 이론을 사회와 농경 때로는 경제 문제에 걸쳐서 펼쳐왔다. 종종 맬서스의한계로 알려진 이 용어는 학자가 역사상의 특정 비극들을 표현하거나 설명하기 위해 쓴다.

1798년 <인구 원리에 대한 에세이 Essay on the Principle of Population>에서 토머스 맬서스 Thomas Malthus는 인류가 결국 번식을 너무해서 식량공급의 한계점을 넘어선다 주장했다. 식량공급 한계점에 도달하면 일종의 '청산 reckoning'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흑사병이 이런 청산작업의 하나로 보인다면 그것은 실제로 외부의 예측불가한 요소이므로 맬서스이론에 들어맞지 않았다.

그의 책 <흑사병과 서구의 탈바꿈 The Black Death and the Transformation of the West>에서 David Herlihy는 인구와 자원을 제어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위기로서 흑사병을 보는 시각을 탐구했다. <흑사병:역사의 전환점인가? The Black Death; A Turning Point in History? (ed. William M. Bowsky) >에서 "흑사병을 중세 말기 사회에서 중추적 역할을 한 것으로 암시하는 시각은 현재 도전 받고 있다. 신맬서스주의경제학을 바탕으로 주장하면서 수정주의 역사가들은 흑사병을 인구과다의 유럽에 필수적이고 장기적 구제수단으로 재조명하고 있다."라고 썼다. Herlihy는 맬서스위기에 맞서는 이런 주장을 다음과 같은 주장을 앞세워서 검증한다. "만약 흑사병이 과잉인구에 대한 반응이라면 수십년 앞서 왔어야 했다." 흑사병 창궐 이전의 인구증가 상황 때문이다.

Herlihy 는 또한 다른 생물학적 요소들을 제기한다. 인구추이에 미치는 기아의 역할 역시 문제가 많다는 주장으로써 흑사병을 일종의 청산작업으로 보는 시각을 반박한다. 흑사병에 앞선 많은 기아들, 심지어 1314-1317년의 대기근도 인구수준에 어떤 뚜렷한 감소도 초래하지 않았다. "중세의 사례으로부터 맬서스의위기가 아니라 어떤 진퇴양난의 상황을 볼 수 있다. 상당 기간에 걸쳐서 안정적 수준으로 매우 대규모의 인구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의미에서 그렇다."라고 시작하면서 Herilhy는 이 문제를 결론짓고 이 현상에 대해 흑사병 이전의 유럽을 묘사하려면 위기라기보다 일종의 교착상태라고 봐야 한다고 썼다.

결과
흑사병으로 추해진 수도사들이 사제로부터 축복 받고 있다. 1360-75년, 영국.

사망자수는 지역과 소스에 따라서 즉 새로운 연구와 발견이 빛을 보면서 매우 다르다. 14세기에 7천5백만에서 2억명을 죽였다 추정한다. 2007년 중세 역사가  Philip Daileader 에 따르면: "최근 연구경향은 4년 간에 걸쳐서 유럽인구의 45%에서 50%가 죽었다는 데에 초점이 모아지고 있다. 지역에 따라 상당한 차이가 있다.  유럽의 지중해와 이탈리아, 프랑스 남부, 스페인에서 흑사병이 4년간 창궐하여서 아마도 인구의 75%에서 80%에 가까운 것 같다. 독일과 영국은 아마 20%에 가까울 것이다."

산 채로 불태워지는 유태인들

이라크, 이란, 시리아 등의 중동지방에 대한 최선의 추정치는 사망율이 1/3이라는 것이다. 흑사병으로 이집트 인구의 40%가 죽었다.  유럽의 정부들은 이 위기에 처하여서 어떤 뚜렷한 대응도 내놓지 못했다. 흑사병의 원인과 전파경로를 몰라서다. 1348년 흑사병이 너무 급속하게 퍼져서 의사나 정부당국에서 그 기원에 대해서 어떤 대책을 세울 겨를도 없이 유럽인구 1/3이 재앙을 맞았다. 인구밀집 도시에서 인구 절반이 죽는 것도 드문게 아니었다. 고립지역의 유럽인은 덜 감염되었다. 수도사들과 사제는 특히 심하게 타격받았으니 그들이 흑사병 희생자들을 돌봐서다. 14세기 치료자는 그 원인을 설명할 길이 없어서 유럽인들이 점성술적 힘, 지진  그리고 유태인의 우물 독 살포를 흑사병 발생의 가능한 원인으로 봤다. 14세기의 아무도 쥐를 잡는 게 흑사병을 막는 길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오로지 신의 분노만이 그런 끔찍한 광경을 초래할 수 있다 믿기 시작했다. 유태인 거주지를 많이 공격했다. 1349년 8월 마인츠와 콜롱의 유태인 거주지가 전멸했다. 앞서 같은 해 2월에는 스트라스부르크에서 2천명의 유태인을 기독교인들이 살해했다.

고행자들이 스스로에게 채찍질하고 있다. 죄를 씻기 위해서다.
이런 운동은 흑사병에 대한 교회의 반응에 일반적인 환멸이 생긴 뒤 널리 퍼졌다.

정부당국을 보면 대부분의 왕국은 흑사병 대책으로써 식료품 수입을 끊고 암시장의 투기꾼을 벌주고 곡물가격을 통제하고 대규모 어업을 불법화했다. 기껏해야 이들 대책은 집행 불능이고 최악의 경우, 대륙 전체에 걸친 하강곡선에 이바지했다. [이러한 조처로] 가장 타격을 입은 영국 같은 나라는 곡물을 수입할 수 없었다.  그 원인은 프랑스의 금지조치와 더불어 다른 곡물생산자들도 노동력부족으로 농사를 망쳐서다. 선적된 식량도 결국 해적이나 도적이 강탈하여서 암시장에 내다 팔았다. 게다가 규모가 큰 국가 중 많은 수가 특히 영국과 스코틀랜드가 전쟁을 계속해서 많은 자산을 소모하고 인플레이션을 촉진했다. 1337년 흑사병의 첫번째 창궐의 전야에 영국과 프랑스가 백년전쟁에 돌입한다. 영양실조, 빈곤, 질병과 굶주림이 전쟁으로 배증하고 치솟는 물가와 다른 경제상황이 14세기 중반의 유럽을 비극으로 내몰았다.

앞서 흑사병의 사회문화적 영향에 대한 참고자료에서 언급했다시피 다시 타오르는 종교적 열정과 광신이 흑사병의 여명기에 만개했다. 일부 기독교도들은 유태인, 탁발 수도사 friars, 외국인, 거지, 순례자, 나환자 그리고 로마 Roma를 타겟으로 삼았는데 이들 그룹이 이 재앙의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해서다. 나환자 및 기타 피부병 즉 여드름, 건선 등의 환자도 전 유럽에서 추방되고 절멸됐다.  문화와 생활양식의 차이도 박해로 이어졌다. 유태인이 일부러 우물에 독을 타서 흑사병을 일으켰다고 의심받았는데  종교적으로 청결하고 공동우물을 쓰지 않아서다. 기독교폭도들이 전유럽에서 유태인거주지를 공격했다. 1351년까지 60 곳의 주요 및 150 곳의 소규모 유태인거주지가 파괴되고 350 건의 개별적 대량학살이 일어났다.

재발

영국에서 인구통계 수치가 없지만 역사가들은 흑사병 이전 인구를 1300년 당시 최대 7백만에서 적게는 4백만로 추정하고 흑사병 이후 인구가 2백만으로 대폭 감소한 것으로 생각한다.1350년 말 무렵 흑사병은 잠잠해지지만 그후 수백년 간 결코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1361-62년,  1369년, 1379-83년, 1389-93년 그리고 15 세기 전반부 내내 추가로 유행했다. 흑사병으로 종종 1 년 안에 지역인구의 10%가 죽었다. 최악의 유행인 경우, 1579년의 노리치 Norwich나 1636년의 뉴캐슬에서 30 혹은 40%가 죽었다. 튜더와 스튜어트 왕조 시절의 영국에서 가장 광범위한 발생들은 모두 독일 및 저지대 국가들 [네덜란드 등]의 흑사병 시기와 일치하는데 1498년,  1535년, 1543년, 1563년, 1589년, 1603년, 1625년, 그리고 1636년에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14세기에서 17세기까지 흑사병은 반복적으로 유럽과 지중해에 출몰했다. 비록 선페스트는 고립된 케이스로 현재도 발병하고 있지만 1665-1666년의 런던 대역병을 마지막 대발생의 하나로 널리 받아들인다.

1466 년 파리에서 4만 명이 죽었다. 1570년 모스크바와 그 인근에서 20만 명이 죽었다. 1575-1577년의 흑사병으로 베네치아에서 약 5만 명이 희생됐다.  1625년 35,417명의 런던시민이 흑사병으로 죽었다. 1634년 흑사병 발생으로 1만 5천의 뮌헨 거주자가 죽었다. 중부유럽의 후기 발병들 가운데 1629-1631의 이탈리아역병은 30년 전쟁에 따른 군대이동과 연관된다. 1679년엔 비엔나 대역병이 있었다. 1654년에서 1656년에 흑사병으로 20만 명의 모스크바 사람이 죽었다.

1348에서 1350년에 60% 이상의 노르웨이 인구가 죽었다. 오슬로에서 최후의 발병은 1654년이다. 1656년 나폴리 거주자 30만 명 가운데 약 절반이 흑사병으로 죽었다. 암스테르담을 1663-1664년에 휩쓸어서 사망자가 5만 명에 달했다.

17세기 전반부에 흑사병으로 이탈리아인구의 1백 73만 명 즉 총 인구의 약 14%가 죽었다. 1백 25만 명 이상이 극단적 발병으로 17세기 스페인에서 죽었다. 30년 전쟁 동안 8백만 명 이상의 독일인이 선페스트와 티푸스열로 사라졌다. 스웨덴 대 러시아 및 그 동맹국들 간의 북방대전쟁 the Great Northern War에 이은 유행병으로 그 지역 인구의 1/3이 죽었다. 1710년의 유행으로 헬싱키 인구의 2/3가 죽었다. 1710에서 1711년 사이의 역병 발발로 스톡홀름 인구 1/3이 죽었다. 유럽 최후의 대규모 유행은 1720년 마르세이유에서다.

흑사병은 이슬람권의 많은 지역을 휩쓸었다. 19세기까지 유행이 반복됐다. 19 세기 중반 3차 대유행이 중국에서 시작돼서 인류가 사는 모든 대륙으로 퍼지고 인도에서만 1천만 명이 죽었다. 이 역병은 약제에 내성을 보일 수 있었고 건강을 위협하는 주요 문제로 떠올랐다. 투여 항생제 중 많은 종류에 내성을 보이는 것은 지금까지 마다가스카르에서 오직 한 사례에서만 발견되고 있다. 1944년부터 1993년까지 미국에서 362건의 인체 감염이 보고됐다. 대략 90%가 서부 지역 4개 주에서 일어났다. 1995년에 서부 9개 주에서 역병이 확인됐다.

당시 문화에 미친 영향

흑사병은 그걸 경험한 모든 세대에 걸쳐서 예술과 문학을 지배했다. 역사가에 유용한, 흑사병에 대한 가장 유용한 문학적 묘사 가운데 많은 수가 연대기 작가들의 기록에서 나온다. 당시의 기록만이 그러한 규모의 재앙 아래 살아간 공포의 느낌을 접할 유일한 길이 되곤 한다. 이들 연대기 작가 중 몇몇은 유명한 작가, 철학자, 통치자들로서 보카치오 나  페트라르카 같은 사람이다. 그들의 저작을 그러나 유럽인구 대다수는 접하지 못했다. 예를 들어서 페트라르카의 작품은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부유한 귀족과 상인이 주로 읽었다.  그는 탁월한 묘사로 수백통의 서신과 구어체 시를 쓰고 후세에게 궁정연애를 개작해서 번역한 작품 하나를 남겼다. 그러나 상류 사교계를 묘사한 서정적 스타일의 작품을 쓰던 어느 음유시인이 1348년에 활동하고 있었다. Peire Lunel de Montech는 툴루즈 Toulouse에서 흑사병이 극성인 시기에 슬픔에 찬 풍자시 sirventes 인 "Meravilhar no·s devo pas las gens" 를 지었다.

"그들은 수백 명씩 밤이나 낮이나 죽어서 모두 ... 도랑 등에 던져져 흙으로 덮였다. 그 도랑이 가득 차자마자 더욱 깊이 파야 했다. 그리고 나, Agnolo di Tura는 내 자신의 손으로 내 다섯 아이를 묻었다. 그리고 너무나 많이 죽어서 모두들 세상의 종말이라고 믿었다."
— 시에나의 역병 The Plague in Siena: 어느 이탈리아 연대기

"얼마나 많은 다양한 사내들이 얼마나 많은 숙녀들이 그들의 친척과 아침 식사를 했다가 같은 날 저녁에 그들의 조상을 저승에서 만나서 저녁식사를 함께 했는가! 사람들의 상태란 쳐다보기에 가련했다. 매일 수천 명이 병에 걸려서 간호 받지 못하고 도움도 못 받고 죽어갔다. 다수가 길바닥에서 죽고 다른 이들은 집에서 죽어서 썩은 시체 냄새가 죽음을 알렸다. 신성한 교회묘지도 산더미 같은 시체에 충분하지 못하여서 시체들은 수백 구씩 넓은 참호들마다 쌓인 게 배에 싣는 화물 같았고 흙으로 얇게 덮을 뿐이었다.
—지오반니 보카치오 Giovanni Boccaccio

[위키피디아를 번역했습니다]




덧글

  • 파리13구 2009/07/05 00:03 # 답글

    훌륭한 번역이십니다! ^^ 잘 읽었습니다.
  • 뽀도르 2009/07/05 22:37 #

    과찬이십니다 ^_^
  • 이레아 2009/07/05 02:36 # 답글

    당시 유럽에 비해서 의학 수준이나 위생에 대한 인식이 높았던 이슬람권에서의 흑사병 도래에 대하여 좀 자세하게 다뤄보실 요량은 없으신지요?
    궁금합니다 :)
  • 뽀도르 2009/07/05 22:39 #

    넵, 시간을 내어보겠습니다.
  • 2009/07/05 07:53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뽀도르 2009/07/05 22:40 #

    1798의 오타(?)이군요 -_-;
  • 2009/07/05 11:26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뽀도르 2009/07/05 23:08 #

    위키백과의 속성 상 그 사이에 원문이 좀 바뀌었는데 번역문에 해당하는 원문은 다음으로 바뀌었네요. 제가 번역할 당시에는 " ...Jews, foreigners, beggars, lepers and Roma ..."이런 식이었는데, 바뀐 글은 아래와 같습니다.

    "It was, arguably, a serious blow to the Roman Catholic Church, and resulted in widespread persecution of minorities such as Jews, foreigners, beggars, and lepers."

    "그건 아마도 틀림없이 로마 카톨릭 교회에 심각한 타격이었으며, 그 결과, 광범위한 박해가 ..."

    좀 바뀌긴 했지만 로마 카톨릭 교회를 언급한 건 맞습니다. 저도, 종교 개혁 전의 중세 유럽에서 왜 로마가 타겟? 인가 생각도 했었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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