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개고기 관련 기사 역사 잡설

조선왕조 실록에서 개고기 관련 기사를 찾아보니 -_-;

삽살개를 그린 조선시대 그림

임금에게 바치는 고기에 개고기를 섞다.

연산 28권, 3년(1497 정사 / 명 홍치(弘治) 10년) 10월 20일(무자) 3번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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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이 아뢰기를,  “임실(任實)에서 범한 바 진상하는 포육(脯肉)에 개고기와 염소고기를 섞어 놓았으니, 신자(臣子)로서 차마 못할 바이온즉 청컨대 잡아 올려서 국문하시옵소서.” 하니, 좇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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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간, 권신 김안로에게 개고기를 구워 아첨하다.

중종 78권, 29년(1534 갑오 / 명 가정(嘉靖) 13년) 9월 3일(병인) 2번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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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은 논한다. 전공간은 강릉 사람이다. 심언광(沈彦光)과 한마을에 살면서 서로 친했다. 언광의 추천으로 미원(薇院)17246) 에 들어가니, 사람들이 속으로는 욕을 하면서 감히 말을 못했다. 당시의 일이 한심하다고 할 만하다. 이팽수(李彭壽)는 정원의 천거도 없었는데 김안로가 마음대로 천거한 것이었다. 본시 팽수는 안로와 한마을에 살았으며 팽수의 아비는 안로의 가신(家臣)이었으므로, 안로는 팽수를 자제처럼 여겼다. 안로는 개고기를 좋아했는데, 팽수가 봉상시 참봉(奉常寺參奉)으로 있을 적에 크고 살진 를 골라 사다가 먹여 늘 그의 구미를 맞추었으므로 안로가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는데 어느날 갑자기 청반(淸班)에 올랐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가장 주서(家獐注書)라고 불렀다. ( 나라의 풍속에 여름에 개고기를 삶아서 먹는 것을 가장(家獐)이라고 한다)


 
진복창, 개고기 구이로 출세를 노리다.

중종 81권, 31년(1536 병신 / 명 가정(嘉靖) 15년) 3월 21일(병자) 1번째기사

반석평(潘碩枰)을 호조 참판에, 남세건(南世健)을 승정원 도승지에, 김희열(金希說)을 좌승지에, 황기(黃琦)를 홍문관 전한에, 진복창(陳復昌)을 봉상시 주부에 제수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김안로가 권세를 휘두를 때 이팽수(李彭壽)가 봉상시 참봉이었는데, 김안로가 개고기 구이를 좋아하는 줄 알고 날마다 개고기 구이를 만들어 제공하며 마침내 김안로의 추천을 받아 청현직(淸顯職)에 올랐다. 그 뒤 진복창이 봉상시 주부가 되어서도 개고기 구이로 김안로의 뜻을 맞추어 온갖 요사스러운 짓을 다 하는가 하면, 매번 좌중(座中)에서 김안로가 개고기를 좋아하는 사실까지 자랑삼아 설명하였으나 오히려 크게 쓰여지지 못하였으므로, 남의 구미(口味)를 맞추어 요행을 바라는 실력이 팽수만 못해서 그러하다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개고기로 출세한 진복창을 죄줄 것을 아뢰다.  

명종 10권, 5년(1550 경술 / 명 가정(嘉靖) 29년) 5월 24일(정해) 1번째기사
양사가 진복창을 율에 의거 죄줄 것을 세 번째 아뢰다

양사가 진복창을 율에 의거, 죄를 정할 것을 청하여 세 번째 아뢰니, 답하기를,
 
“국가에 공이 없지 않으므로 결코 무겁게 다스릴 수 없다. 부처(付處)하는 것이 옳다.”【진복창을 삼수(三水)에 부처하였다.】
 
하였다. 율에 의거, 죄를 정할 것을 다섯 번째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송세형 등이 차자를 올리기를,
 
“진복창의 불경하고 부도한 죄는 일조 일석에 저지른 것이 아닙니다. 호서(狐鼠)의 버릇과 귀역(鬼蜮)의 독을 빚게 된 것은 유래가 있습니다. 신들이 삼가 그 자취를 드러낸 유래와 그가 평소 한 일의 대략을 진술하여 그 정상을 밝히겠습니다.
 
진복창의 어미는 처음에 말 거간꾼에게【유수변(柳水邊)임.】 시집가서 7개월 만에 자식을 낳았기 때문에 좇겨났고 뒤에 역관(譯官)에게【박원지(朴元祉)이니, 아명(兒名)은 개말치(介末致)이다. 뒤에 복창이 현달하니 마을 사람들이 개말치의 의붓자식이라고 지목하며 비루하게 여겼다.】 시집갔으며, 그 뒤에 복창의 아버지인 진의손(陳義孫)이 녹사(錄事)로 있을 때 시집가서 살았습니다.【이름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이 세 사람이고 이름을 기억할 수 없는 자도 또한 많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그를 천하게 여겼습니다. 진복창은 이런 흠이 있어 과거를 보기 어려운 형편이었는데, 그 부계(父系)가 유인숙(柳仁淑)·유희령(柳希齡)의 족속과 연결된 연고로 유씨 가문을 빙자하여 과거를 보아 이름을 낼 수가 있었습니다.
 
그것만도 이미 큰 행운이라고 할 수 있었는데, 감히 분수에 넘친 계획을 품고 밀어주는 세력을 얻을 것을 생각하여 처음에는 김안로(金安老)를 섬기어 개고기 구이(견적 犬炙)가 이팽수(李彭壽)에 미치지 못한다.’는 질책을 받기까지 하였고, 【진복창이 봉상 주부(奉常主簿)로 있을 때 이팽수와 동료였는데, 김안로를 아첨해 섬겨서 그 세력으로 좋은 벼슬을 얻으려고 다투어 개고기 구이를 가지고 아첨하였다. 진복창은 자신이 구운 개고기 구이의 맛이 최고라고 생각하고 올렸지만 김안로는 오히려 이팽수가 구운 개고기 구이의 맛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또 유인숙·허자·구수담을 섬길 때에는 노비처럼 아첨하며 날마다 그들의 문에 절하였는데, 김안로·유인숙·허자는 진복창이 아주 미천하므로 반드시 공론에 용납되지 못할 것이라 여겨 좋은 관직에 앉힐 것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구수담과 진복창은 집이 서로 가까왔기 때문에 진복창이 구수담에게 아첨하여 섬긴지 여러 해였으므로 구수담은 진복창의 아부한 정을 잊지 못하여 그를 추천해서 지평(持平)을 삼았는데, 곧 여론의 지탄을 받았습니다.
 
진복창의 미천함이 이미 그와 같은데다 그가 풍덕(豊德)에 있을 때나 서울에 와서 있을 때나 착한 짓은 하나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용렬하고 비루한 일들은 이루 다 지적하여 논할 수가 없습니다. 그가 사는 마을의 사람들은 모두 그를 천히 여기고 미워하는데, 오늘날에 와서 갑자기 은총을 받으니, 온 나라 사람들은 진복창이 공이 있는지 없는지는 알지 못하고 단지 진복창의 간사함만을 보고 모두들 해괴하게 여깁니다. 진복창은 온 나라 사람들이 해괴히 여기는 사실을 보고 들은 뒤로 의혹이 많아져서 남들이 혹 자신에 대해 뭐라 했다는 말을 들으면 꼭 말이 나온 근원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그때문에 사람들이 모여 대화할 때 진복창의 성명에 언급이 되면 모두 소름이 끼쳐 입을 다물었습니다.
 
진복창은 이에 물정이 해괴히 여기는 것을 유감으로 여기고, 세상에 용납되고자 생각하여 밤낮없이 공경(公卿)·사대부의 집들을 찾아다니며 교제를 청하였습니다. 상대방이 혹 웃는 얼굴로 대해 주고 주식(酒食)을 베풀어 주면 자기를 후하게 대한다 하고, 혹 침묵을 지키고 엄정하게 대하면 자기를 가볍게 대한다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공경·사대부들이 그를 큰손님 대접하듯 하였습니다. 또 그는 강제로 문사(文士)를 초청하여 한 달 사이에 술자리를 베푸는 날이 절반이나 되었는데, 그의 초청을 받은 자는 마음속으로는 싫어하면서도 억지로 그 연회에 참석하기를 마치 독사의 굴에 들어가는 것처럼 여겼습니다. 진복창은 매번 남에게 자랑하기를 ‘내가 어느 집에 갔더니 아무개는 나를 매우 후하게 대접하였고, 아무개는 내 집에 와서 술을 마셨으니, 바로 나의 절친한 벗들이다.’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사대부들이 그와 더불어 이야기하기를 부끄러워하였고 혹은 무서워서 피하는 자들도 많았습니다.
 
진복창이 관사(官司)에 있을 때는 인심이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전에 사성(司成)으로 학궁(學宮)에 있을 적에는 학궁 유생들이 간신이라고 지목하여 수업하기를 부끄러워하기까지 하였으며, 전번에 대간(臺諫)의 장관으로 있을 적에는 부하들이 그와 더불어 일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가만히 서로 개탄하며 입을 다물고 참고 지냈습니다. 또 직제학(直提學)으로 홍문관에 있을 때에는 온 관원이 이른 아침에 조회하는데 진복창은 여러 곳을 돌아다니다가 저물녘에야 비로소 이르러 거만을 부리며 논박하지 않아도 될 일을 가지고 대간을 공격하려고 하였는데, 동료의 의논이 통일되지 않자 그는 제뜻대로 되지 않는 것에 화를 내고 무단히 나가 버렸습니다. 이에 하리(下吏)와 전복(典僕)들은 해괴하게 여겼고, 관원들은 책할 것도 없다고 여겨 치지도외하였습니다. 정원(政院)은 근밀(近密)한 지위로 상하 관원이 예모를 차리는 것이 예로부터 매우 엄격한데 진복창이 동부승지로 있을 때 예모를 돌보지 않고 임의로 출입하자, 동료들은 모두 그의 방자함을 못마땅하게 여겼으나 두려워서 감히 책하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밖에 총애를 믿고 꺼림없이 행동하고 은혜를 팔고 위엄을 마구 부렸습니다. 이를테면 형장을 쓰는 아문(衙門)의 관원에게 은밀히 부탁하여 좋아하거나 미워하는 사람에게 살리거나 죽이는 권한을 행사하려 하여 매번 작은 쪽지에다 이름을 적어서 형조(刑曹)의 색리(色吏)에게 보내면 색리는 두려워서 그대로 따랐습니다. 이처럼 남을 위협하거나 탐욕스럽게 굴어 성스러운 정치에 누가 되게 한 일을 어떻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신들이 우선 그의 일반적인 정상을 든 것인데, 온 나라 사람들은 그가 소인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가 원훈(元勳)의 집에 가서는 역적을 극력 헐뜯고, 이의를 가진 사람을 보면 역적을 함부로 다스렸다고 하면서 유감(柳堪)과 안명세(安名世)를 두둔하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관후(寬厚)하다는 이름을 낚아 뒷날 빠져 나갈 터전을 마련하기 위한 교활한 계책이었습니다. 남몰래 한 대관(臺官)에게 부탁하여 자기에게 붙지 않은 10여 명의 명사(名士)를 논박하여 죄망(罪網)에 빠뜨리려 하였는데 그 대관이 논박할 만한 사실이 없다고 하면서 응하지 않자 그는 깊이 앙심을 품었습니다. 이것은 그가 흉계를 자행한 것의 일단입니다. 또 진복창은 구수담과 심교(心交)를 맺고 매번 국사를 사적으로 의논하였으니, 그 형적이 매우 불칙합니다. 그 주고받은 서신 중에는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이 있으니, 만일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국문한다면 간사한 정상이 저절로 드러날 것입니다. 홍문관의 병풍에 쓴 글과 유강(兪絳)의 집에 가서 한 말에 대해서는 신들이 몹시 통분한 마음 금할 길 없으니 의리상 한 하늘 밑에 같이 살 수 없습니다.
 
진복창은 출생이 이미 더러워서 비천한 행위가 습관화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제뜻대로 하게 되자 좌우를 능멸하고 끝내는 불경스럽고 패역한 말로써 군상에 대해서까지 언급하였습니다. 온 나라 사람들이 처음에는 그를 천시하고 미워하였으며, 중간에는 해괴하게 여겼고, 마침내는 그의 고기를 씹고 싶어했습니다. 공론이 일어나자마자 서울 사람들은 서로 경하하여 범을 잡는 것으로 비유하였으니 온 나라 사람의 심정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쾌히 공론을 따라 왕법을 시행하소서.”
 
하였다.

강원 감사 유석,  개고기가 맛이 없다고 요리사를 때려 죽이다.


효종 1권, 즉위년(1649) 기축 / 청 순치(順治) 6년) 8월 19일(병오) 4번째기사
이정영 등이 심액이 상피를 무시하여 법을 어겼음을 간하다

정언 이정영(李正英)이 인피하기를,
 
“전조(銓曹)의 주의가 공정치 못한 것이 어떠한 잘못인데 종시토록 침묵하여 탄핵하는 소장이 도리어 원로 대신에게서 나오게 하였으니, 간관(諫官)의 직을 지니고서 어찌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강원 감사 유석(柳碩)은 국상을 당한 이때 방자하게 공석에서 고기를 먹고, 심지어 가장(家獐)을 마련해 먹으면서【나라의 풍속에 여름에 개고기를 삶아서 먹는 것을 가장(家獐)이라고 한다.】 맛이 없다고 화를 내며 요리하는 사람을 매로 쳐서 죽게까지 하였으니, 어떻게 이런 사람을 풍속을 살피는 직임에 그대로 둘 수 있겠습니까. 신이 이미 간통(簡通)하여 동료들의 의견이 일치되었는데 미처 논계하기 전에 사람들이 모두 말을 전하였으니 논계하는 일을 허술하게 한 잘못이 드러났습니다. 신을 체직시키소서.”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다.

현개 5권, 2년(1661 신축 / 청 순치(順治) 18년) 4월 6일(을유) 4번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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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승지 남용익(南龍翼)이 아뢰기를,
 
“근자에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는다는 설이 나도는데, 비록 사실인지의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사람들이 많이들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니, 유성이 아뢰기를,
 
“어떤 한 행인이 길가의 집에 쉬러 들어갔더니, 그 집 주인이 삶은 고기를 내왔는데, 그 맛이 쇠고기도, 말고기도, 개고기도, 돼지고기도 아니어서 마음속으로 매우 괴상하게 여겼습니다. 나와서 집 뒤를 보니, 사람의 머리와 다리가 있었으므로 그 사람은 비로소 그 고기가 사람고기라는 것을 깨닫고 놀라 달아났다 합니다. 이 말은 사람들이 많이들 전하고 있으니, 진실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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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별나라전갈 2009/04/22 18:56 # 답글

    개고기는 비상식량(?)이기도 했지만 살기가 어려울 때는 개에게 먹일 밥이 없어 갓난 아기의 똥을 먹이기도 했다지요. 너무 배가 고픈 개가 갓난 아기의 똥만 먹어야 하는데 그만 남자아이의 땅콩(??)까지 먹어버리는 일도 있었다는 얘기를 책에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쓰고 보니 왜 이런 덧글을 쓰고 있는지 모르는 1人 ㅠㅠ....
  • 뽀도르 2009/04/23 10:24 #

    그런 아이들이 내시가 되었다죠. 중국 내시들은 사람이 잘라서 만들었지만, 조선의 내시들은 불의의 사고를 당한 남자들 중에서 뽑았다지요.
  • 칼군 2009/04/22 22:58 # 답글

    김안로가 개고기를 참 좋아했나보군요..
  • 뽀도르 2009/04/23 10:25 #

    권신이라 돈도 많았을 건데 개고기를 그리 좋아한 거 보면 개고기 매니아였네요.
  • nelboai 2009/04/23 00:45 # 삭제 답글

    뽀송이 사진을 둘러보앗는데
    아..정말 매력적인 냥이로군요..
    우리 냥이들이랑 한번 소개팅이라도..ㅎㅎㅎ
  • 뽀도르 2009/04/23 10:26 #

    불행히도 저희 냥이들은 모두 중성화해서 중매 서기가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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