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격전 대 총력전
"소련 군대에서 후퇴하고 싶다면 진격하는 거보다 더 용감해야 할 것이다." - 이오시프 스탈린
독일(나치독일)은 전격전의 개념으로 전쟁을 일으킵니다. 국민을 총동원하는 총력전의 개념 없이 여자는 집에서 애나 보라고 하여 군복무나 공장 근무에 투입되지 않습니다. 반면에 소련(소비에트연방)은 여자 저격수에 여자 전차 승무원에 여자 폭격기 승무원까지 나옵니다. 여자들이 공장에서 중요한 제조 인력이 된 것은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독일은 주요한 인적 자원인 유대인들을 600만명이나 학살해버립니다. 기타 그들이 열등하다고 본 민족들을 죽이기 바빴으니 소련의 물량에 밀리게 된 것은 필연입니다. 전격전으로 단기간에 전쟁을 마무리한다는 개념은 두고두고 독일을 괴롭히게 됩니다. 동절기 장비를 제대로 갖추지 않고 바르바로사작전(독일의 소련침공 작전)에 돌입하여 동장군에게 저지된 것은 유명합니다. 독일의 총력전 태세의 미비는 그만큼 나치독일의 사회적 기반이 튼튼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는 시각도 있습니다.
결국 독일도 총력전 태세로 돌입하게 되어 알베르트 슈페어의 지도 아래 군수품 생산이 3배로 늘고 전쟁의 막바지인 1944년 말에 오히려 군수품 생산은 최고조에 달합니다만 너무 늦었던 것입니다. 연합군의 대대적 전략 폭격 하에서도 이런 정점에 달한 것은 그 전 몇해 동안 얼마나 총력전 태세가 부족했는가를 반증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전 몇년 간에 일반 소비용품의 생산이 많았고 그 재고도 많아서 대전의 말기에 대규모 폭격 하에서 생필품 부족을 덜 심각하게 한 측면도 있다고 합니다. 공장이나 기계 공구도 풍부하고 풀가동 안한 것도 많아서 공중 폭격으로 파괴된 것을 보충할 수 있었습니다. 노예 노동자와 외국 노동자도 대규모로 쓰였습니다.
독일에 맞선 소련은 명령식 경제로 총력전 태세에 맞추어 경제와 사회를 재조직할 수 있는 경제적 법적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1941년 독일이 침공하여 전진을 계속하자 소련이 공장과 노동자들을 우랄산맥 쪽으로 옮겨간 것은 이런 시스템의 효율을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총력전 수행에 필요한 공장들만 뜯어서 옮겼습니다. 전쟁 전에 군 숙청이라든가 여타 대규모 숙청으로 제살 깎아 먹은 것도 많지만 대전이 발발한 뒤 총력전 체제는 잘 가동됩니다.
동부전선은 중앙유럽 및 동부유럽에 걸친 사상유례 없는 대규모 전쟁이었습니다. 동원된 병사, 장비, 전사자, 파괴, 막대한 인명손실 등은 비할 데 없었습니다. 수백 킬로미터 전선에 걸쳐 수백만 독일군과 소련군이 작전하였습니다. 현대 학자들의 추정에 따르면 2천 7백만 명의 소련인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 가운데 870만 명의 소련군 장병이 히틀러의 나치 독일에 맞서 전사하거나 포로수용소에서 죽어갔습니다. 수백만의 시민들이 기아, 잔학 행위, 학살 등으로 죽었습니다.
레닌그라드전투에서 신형 T-34 전차가 페인트 부족으로 도색도 하지 못한 채 공장에서 바로 전선으로 출고된 것은 소련의 대애국 전쟁에 바쳐진 노력과 총력전 정책을 상징합니다. 러시아인들의 헌신을 이끌어내고자 공산정권은 조국애를 진작하고 심지어 전쟁수행에 도움이 되리라 판단, 러시아 정교회를 다시 여는 것도 허락합니다.
자료 : http://en.wikipedia.org/wiki/Total_war

독일(나치독일)은 전격전의 개념으로 전쟁을 일으킵니다. 국민을 총동원하는 총력전의 개념 없이 여자는 집에서 애나 보라고 하여 군복무나 공장 근무에 투입되지 않습니다. 반면에 소련(소비에트연방)은 여자 저격수에 여자 전차 승무원에 여자 폭격기 승무원까지 나옵니다. 여자들이 공장에서 중요한 제조 인력이 된 것은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독일은 주요한 인적 자원인 유대인들을 600만명이나 학살해버립니다. 기타 그들이 열등하다고 본 민족들을 죽이기 바빴으니 소련의 물량에 밀리게 된 것은 필연입니다. 전격전으로 단기간에 전쟁을 마무리한다는 개념은 두고두고 독일을 괴롭히게 됩니다. 동절기 장비를 제대로 갖추지 않고 바르바로사작전(독일의 소련침공 작전)에 돌입하여 동장군에게 저지된 것은 유명합니다. 독일의 총력전 태세의 미비는 그만큼 나치독일의 사회적 기반이 튼튼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는 시각도 있습니다.
결국 독일도 총력전 태세로 돌입하게 되어 알베르트 슈페어의 지도 아래 군수품 생산이 3배로 늘고 전쟁의 막바지인 1944년 말에 오히려 군수품 생산은 최고조에 달합니다만 너무 늦었던 것입니다. 연합군의 대대적 전략 폭격 하에서도 이런 정점에 달한 것은 그 전 몇해 동안 얼마나 총력전 태세가 부족했는가를 반증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전 몇년 간에 일반 소비용품의 생산이 많았고 그 재고도 많아서 대전의 말기에 대규모 폭격 하에서 생필품 부족을 덜 심각하게 한 측면도 있다고 합니다. 공장이나 기계 공구도 풍부하고 풀가동 안한 것도 많아서 공중 폭격으로 파괴된 것을 보충할 수 있었습니다. 노예 노동자와 외국 노동자도 대규모로 쓰였습니다.
독일에 맞선 소련은 명령식 경제로 총력전 태세에 맞추어 경제와 사회를 재조직할 수 있는 경제적 법적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1941년 독일이 침공하여 전진을 계속하자 소련이 공장과 노동자들을 우랄산맥 쪽으로 옮겨간 것은 이런 시스템의 효율을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총력전 수행에 필요한 공장들만 뜯어서 옮겼습니다. 전쟁 전에 군 숙청이라든가 여타 대규모 숙청으로 제살 깎아 먹은 것도 많지만 대전이 발발한 뒤 총력전 체제는 잘 가동됩니다.
동부전선은 중앙유럽 및 동부유럽에 걸친 사상유례 없는 대규모 전쟁이었습니다. 동원된 병사, 장비, 전사자, 파괴, 막대한 인명손실 등은 비할 데 없었습니다. 수백 킬로미터 전선에 걸쳐 수백만 독일군과 소련군이 작전하였습니다. 현대 학자들의 추정에 따르면 2천 7백만 명의 소련인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 가운데 870만 명의 소련군 장병이 히틀러의 나치 독일에 맞서 전사하거나 포로수용소에서 죽어갔습니다. 수백만의 시민들이 기아, 잔학 행위, 학살 등으로 죽었습니다.
레닌그라드전투에서 신형 T-34 전차가 페인트 부족으로 도색도 하지 못한 채 공장에서 바로 전선으로 출고된 것은 소련의 대애국 전쟁에 바쳐진 노력과 총력전 정책을 상징합니다. 러시아인들의 헌신을 이끌어내고자 공산정권은 조국애를 진작하고 심지어 전쟁수행에 도움이 되리라 판단, 러시아 정교회를 다시 여는 것도 허락합니다.
자료 : http://en.wikipedia.org/wiki/Total_war
덧글
적당한 자원의 지원없는 총력전(특히나 인력에 의존한) 총력전은 답이 없죠.
일본군 애들은 당시에 뭐 기술도 없고 뭣도 없이 그냥 애들만 뭐나게 굴렸으니까요-_-
뭣보다 얘들은 인적 자원을 "소모품"으로 생각하고 "소비"를 했었죠.
그들에게 당한 주변국은 말할 것도 없겠지만요.
'어, 슬슬 중앙 뺏기겠다? 뺏기는가?' 싶으면서도 의자에 등 기대고 마우스만 깔짝거렸군요.
얼굴 모니터에 박고 머리도 굴려가며 양손 다 미친듯이 놀려야지.
사실, 히틀러만큼 초기에는 놀랄 만큼 성공만 하다가
그 뒤에는 놀랄 만큼 실패만 한 인물도 드물다지요.
자원을 노렸던 것이라고 히틀러가 소련과 전쟁을 벌인 이성적인 이유를 대지만
결국 히틀러의 광기가 독일을 패배로 내몰았다고 봅니다.
최소한 영국은 제압하고 미국과 대서양에서 싸우는 도중이었다면 몰라도 2개의
전선을 유지하려고 하다니... 지네들이 무슨 미국인줄 알았는지.... ㅡ.ㅡ;;;
해당 주제에 관한 채승병님의 좋은 소개글이 이미 트랙백되어 있어 별도의 글을 쓰지 않았습니다만 뽀도르님의 반응을 보니 한번쯤 언급해두는 것도 좋을 듯 하여 글을 남깁니다. 사실 저도 마크 해리스가 쓴 "The Economics of World War II", MGFA의 DRZW 5/1.5/2, 그리고 리처드 오버리의 War and Economy in the Third Reich나 Why the Allies Won등은 이미 읽어봤기에 저러한 표현은 사실과 거리가 있는, 아니 꽤 멀리 있는 괴담일 수 밖에 없다 생각되는군요.
소개글이라도 한 번 읽어보세요.
기본적으로는 우마왕님 의견에 동감합니다.
아마 소련관의 대비점을 부각하려다가, 독일에 대한 오해도 생긴게 아닌가 싶군요.
그런데 망상은 망상일뿐 그 유대인 여자는 이미 약혼까지 한상태였으니
그렇게 실연(?)당한 히틀러는 아마 그이후로 유대인 자체를
싫어한것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