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번역이 아니고 그냥 잡설을 풀어가며 씁니다.
1939년부터 1945년까지 독일과 소련이 개발한 전차들을 시대 순으로 간략히 정리해봤습니다.
1939년부터 1945년까지 독일과 소련이 개발한 전차들을 시대 순으로 간략히 정리해봤습니다.
1939년

훗날 T-34로 발전합니다.

적 전차를 잡는 역할을 담당. 3호 전차는 뒤에도 개량을 거듭, 장포신 50미리 장비형도 나오고,신뢰성 높은 차체를 활용 대구경포를장비한 돌격포 등 많은 파생 차량의 토대가 됩니다.
1940년

3호 전차가 대전차 전투를 담당하는 한편, 4호 전차는 애초에 움직이는 포대와 같이보병 지원에 중점을 두어, 짧은 포신의 75미리 포를 장비했습니다. 전쟁 개시부터 종료시까지 독일군의 튼튼한 군마 軍馬와 같은 존재, 4호 전차초기에는 중重전차로 분류될 만큼 배치 수량이 적었으나 곧 독일 기갑 군단의중핵이 됩니다.

전차 차체에 가분수의 거대한 포탑을 단 자주포의 효시가 될 법한 차량입니다.

경량의 3호 전차에 대구경 포를 달기 위한 고육책. 장갑 관통력이 떨어지는 단포신 75미리포를 달았습니다만, 훗날 티거 전차의 에이스로 이름을 떨친 미하일 비트만은 초기에 이런 단포신 3호 돌격포를 몰며 소련 전차들을 사냥했다는 전설이... 제가 예전에 본 만화 '강철의 사신'에 나오더군요.

이 괴물을 막을 무기는 88mm 대공포의 직사뿐이었습니다. 덩치에 비해 화력은 T-34와 마찬가지여서 뒤에 스탈린 전차로 대체됩니다.


2차대전 초기 독일 기갑군의 주력은 이와 같은 경전차들이었습니다.

장포신의 50미리포로 위력을 높였습니다. 그러나 T-34를 대적하기엔 부족했습니다.

사방이 경사진 장갑에 강력한 76.2mm포, 러시아 도로 사정에 적합한 넓은 트랙, 우수한 기동성 등 그 월등한 성능은 독일군을 충격에 빠뜨립니다.
1941년

아직도 단포신의 75미리포를 장비하고 있습니다.

T-34를 잡기 위한 응급 처방

덧글
부지불식 간에 3호 전차라고 적었군요 ㅋㅋ 정정하겠습니다.
기본적으로 바펜 SS 자체가 육군과 비슷하지만 그 인적 자원의 구성은 반드시 육군을 따르지 않았다는 점을 상기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비트만이 돌격포를 타게 될 때가 LSSAH가 차량화보병여단으로 확대되던 시점이었고, 숙련된 기갑병과 인원이 존재할 수 없던 바펜SS의 당시 인적 구성의 특성상 장갑차라도 경험한 비트만이 돌격포의 차장이 된 겁니다.
2. 정확히 문제가 되는 표현은 "경량의 3호 전차에 대구경 포를 달기 위한 고육책"이란 부분입니다. 기본적으로 돌격포는 3호 전차의 차대에 만들어진 것이니 3호전차라는 게 문제가 되진 않습니다. 정확히 문제가 되는 건 대구경포를 달았는데 75mm 단포신으로 받는 것이지요. 그 논리대로라면 StuH에선 105mm도 달았다는 점은 어떻게 해석해야 될까요?
사실 "경량의 3호 전차에 대구경 포를 달기 위한 고육책"이란 표현이 맞으려면 1942년에 3호전차가 장포신 75mm를 달 수 없었다는 이야기로 받는 게 옳습니다. 75mm 포의 장착에만 한정한다면 전차형이라도 75mm 포를 장착한 Ausf.N형이 있으니까요.
>>기본적으로 바펜 SS 자체가 육군과 비슷하지만 그 인적 자원의 구성은 반드시 육군을 따르지 않았다는 점을 상기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비트만이 돌격포를 타게 될 때가 LSSAH가 차량화보병여단으로 확대되던 시점이었고, 숙련된 기갑병과 인원이 존재할 수 없던 바펜SS의 당시 인적 구성의 특성상 장갑차라도 경험한 비트만이 돌격포의 차장이 된 겁니다.
"1940년 5월 10일 황색 작전(Fall Gelb)이 발동되어 LSSAH연대는 네델란드에 침공했다. 벨기에 침공에 이은 프랑스점령작전에 참가한 비트만은 덩케르크 포위전에서 일익을 담당했다. 6월 22일 프랑스와 휴전협정이 체결되었다. 그후 SSVT는 무장친위대로 명칭을 바꾸고, LSSAH연대는 이후 여단 편제로 변경된다. 이때 비트만은 돌격포 중대 편성을 위해 선발되어 유터보그 포병학교에 보내졌다. LSSAH의 돌격포병이 된 비트만은 그리스 전역에 투입되고(그리스는 산악지형이라 돌격포의 역할은 미미했음) 이후 독일-소비에트 국경으로 이동한 뒤, 1941년 6월 22일에 개전한 독소전에 참가했다."
(http://ko.wikipedia.org/wiki/%EB%AF%B8%ED%95%98%EC%9D%BC_%EB%B9%84%ED%8A%B8%EB%A7%8C)
"While the StuG III was considered self-propelled artillery it was not initially clear which arm of the Wehrmacht would handle the new weapon. The Panzer arm, who was the natural user of tracked fighting vehicles, had no resources to spare for the formation of StuG units, and neither did the Infantry branch. It was therefore agreed, after a discussion, it would best be employed by becoming a part of the artillery arm."
돌격포의 도입 당시, 자주포이면서 장갑차량이라서 배속 병과에 관한 논란 끝에 기갑부대나 보병부대가 아닌 포병부대의 일부로 배속하는게 최선이었다는 글입니다.
Wittmann's unit was soon dispatched to the Eastern Front to participate in the invasion of the Soviet Union. He initially served as a commander of a StuG III assault gun. He was assigned for both officer and tank training in the winter of 1942–43.
물론 전통적인 포병대와는 달랐습니다만, 폴란드 작전이나 동부 전선 초기에, 비트만은 3호포 지휘관으로 당시 상황으로 포병에 배속되었을 것입니다.
>>2. 정확히 문제가 되는 표현은 "경량의 3호 전차에 대구경 포를 달기 위한 고육책"이란 부분입니다. 기본적으로 돌격포는 3호 전차의 차대에 만들어진 것이니 3호전차라는 게 문제가 되진 않습니다. 정확히 문제가 되는 건 대구경포를 달았는데 75mm 단포신으로 받는 것이지요. 그 논리대로라면 StuH에선 105mm도 달았다는 점은 어떻게 해석해야 될까요?
>>사실 "경량의 3호 전차에 대구경 포를 달기 위한 고육책"이란 표현이 맞으려면 1942년에 3호전차가 장포신 75mm를 달 수 없었다는 이야기로 받는 게 옳습니다. 75mm 포의 장착에만 한정한다면 전차형이라도 75mm 포를 장착한 Ausf.N형이 있으니까요.
전황이 급박한 1942/43년에는 3호 전차의 포탑에 75mm를 무리하게(?) 달고 있습니다만, 돌격포 개념이 폰 만슈타인 등에 의해 나온 1930년대에는 3호 차체에 당시의 37mm포에 비해 대구경인 75mm포를 탑재하는 합리적인 방법이 포탑을 없앤 돌격포 형식이라고 봐도 큰 무리는 없을 겁니다. 75mm포가 대구경이란 것은 기존의 37mm, 50mm포에 비해 큰 구경이었다는 뜻이었습니다.
>>물론 전통적인 포병대와는 달랐습니다만, 폴란드 작전이나 동부 전선 초기에, 비트만은 3호포 지휘관으로 당시 상황으로 포병에 배속되었을 것입니다.
답글과 달리 인용하신 한국어 위키에 이미 "비트만은 SS친위기갑연대(LSSAH연대) 장갑차소대에 배속되어 폴란드 전쟁에 참전했다."라는 구절이 있는 걸 놓치고 계시는군요. 물론 당시 LSSAH가 SS친위기갑연대라고 쓴 부분은 사실과 다르지만 1939년 폴란드 전역에서 프랑스 전역에 이르기까지 비트만이 LSSAH의 수색대의 장갑차 소대에 있던 것은 사실입니다. 단지 그 때 그가 탑승한 차량이 sdkfz. 231이냐 232냐 222냐는 논란이 되고 있지만 말이죠. 그리고 폴란드 전역에서 돌격포 지휘관이 될 수 없는 이유가 돌격포대가 SS에 도입된 시점이 프랑스 전역 이후, LSSAH가 본격적으로 여단편제로 확장되는 시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폴란드에선 비트만이 3호 돌격포에 타고 싶어도 탈 수 없었지요. 존재하지도 않는 무기를 뭔 재주로 타겠습니까
위 구절은 한글 위키가 아닌 영문 위키의 다음 구절에 근거했습니다만,
"His first experience of combat came in the Polish Campaign, followed by the Battle of France as a commander of the new self-propelled assault guns, the Sturmgeschütz III Ausf. A. "
위키 백과의 성격 상 영문 위키가 반드시 더 정확하다고는 할 수 없을테니, 추후 더 조사가 필요하겠습니다.
In October of 1939, Michael Wittmann joined the 5th Panzersp채hkompanie (the depot company of the Leibstandarte) based at Berlin (Lichterfelde), which was an assault gun "academy". In February of 1940, Wittmann was transferred to the newly formed SS-Sturm-Batterie (assault gun battery - Sturmartillerie) of LSSAH, equipped with Sturmgeschutz Ausf A assault guns
정리하면 폴란드 출정에서는 장갑차를 몰고 참전했다가 1939년 10월 베를린의 돌격포 아카데미에서 교육 받고 LSSAH의 돌격포 중대에 배속됐군요.
>>돌격포의 도입 당시, 자주포이면서 장갑차량이라서 배속 병과에 관한 논란 끝에 기갑부대나 보병부대가 아닌 포병부대의 일부로 배속하는게 최선이었다는 글입니다.
전차, 혹은 기갑병과의 탄생시부터 기갑병과의 개념을 이해하던 독일 육군의 '젊은(2~30대란 이야기가 물론 아닙니다.)' 장교들은 기갑병과을 효과적으로 운용하기 위해서는 차량화 포병과, 차량화 보병이 수반되어야 함을 이해 - 전차가 갖는 한계를 인식- 하고 있었고, 돌격포를 제안한 에리히 폰 만슈타인도 그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기갑병과의 특성상 더 늦게, 단독으로 작전할 때 시의적절하게 기갑병과의 지원을 받을 수 없을 것이라 판단한 폰 만슈타인이 강화점에 대한 보병의 공격을 지원하고, 경우에 따라 적 전차의 공세시 제한적 교전을 벌일 수 있는 무기로 제안한 것이 돌격포입니다. 그 포지션에 대해 말썽이 생긴 이유는 돌격포가 3호전차의 차대를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3호전차는 막 기갑병과에 배치가 시작(1939년 당시에는 98대에 불과했습니다)된 기갑병과의 입장에서 신병기였는데 당장 1호전차부터 퇴출시키고 싶었던 기갑병과에서 3호전차 차대를 나눠준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애초에 포병병과는 차량화되지 않으면 보병과 함께 행동하는 병과였습니다. 다시 말해 인용문의 상황은 어디까지나 돌격포는 필요한 무기고, 이를 위해선 기갑병과가 양보해야 한다는 뉘앙스의 글이죠.
역시 영문 위키의 내용인데 '돌격포 승무원은 포병대의 엘리트로 간주되었다'.
거의 전차처럼 쓰인 포병 차량인 셈이군요.
>>전황이 급박한 1942/43년에는 3호 전차의 포탑에 75mm를 무리하게(?) 달고 있습니다만
애초에 무리가 아닙니다. 3호전차를 개발할 때 7.5cm/L24를 다는 것이 무의미했기 때문에 고려되지 않았던 겁니다. 무엇보다도 4호전차 자체가 3호전차의 개발시안으로 제안되었다는 점을 잊으신 듯 하군요. 3호전차 자체가 대전차 전투를 위해 개발되었기 때문에 유탄의 위력은 좋을지 몰라도 목표를 정확히 명중시켜야 하는 대전차포로서의 미덕이 부족한 7.5cm/L24를 장착할 이유가 없었고, 당시 각국 전차를의 주포를 감안해볼 때 5cm 포를 장착할 필요가 있다고 봤습니다. 물론 5cm 포를 달자는 기갑병과의 주장은 대전차포와 탄약공용을 운운하는 보병병과의 주장에 밀려 3.7cm를 달되 5cm 포로 확장이 가능하도록 한다는 절충안으로 도입되었고 말이죠.
기타 잡다한 것들에 대해서 참 잘 알고 계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