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 최대의 전차전, 프로호로프카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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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호로프카 전투 는 독일국방군 제4기갑군 과 붉은군대 제5근위전차군 이 2차대전 동부전선 에서 맞붙어 싸운 사상최대 전차전의 하나다.
1943 년 7월 5일 독일군 최고사령부 는 치타델 작전 에 나서는데 목표는 쿠르스크 돌출부 의 소련군 괴멸 이었다. 그곳의 붉은군대를 짓부순다면 독일국방군이 동부전선의 주도권을 다시 잡을 수 있었고 이 작전은 5개 독일야전군이 쿠르스크 돌출부 의 양 측면을 협공하여 달성할 것이었다.
소련 최고사령부 스탑카 는 독일이 쳐들어 올 것을 내다보고 종심작전 교리에 따라 종심방어를 준비하고 주코프 소련군 원수 는 이오시프 스탈린 에게 붉은군대는 방어에 전념하여 독일군을 소모시켜야 한다고 확신시켰다. 독일군이 충분히 소모되면 소련군은 작전 예비병력 을 동원, 독일군 선봉을 깨뜨릴 수 있을 것이었다.
그 뒤 쿠르스크 전투 에서 독일군은 북쪽 오렐 지구 에서 저지당하지만 남쪽 독일국방군과 무장친위대는 더욱 깊숙히 침투, 프로호로프카에 다가갔다. 붉은군대는 그들이 내다봤던 것보다 빨리 예비병력을 쏟아넣어야 했다. 이에 따라 1943년 7월 12일 벌어진 기갑부대 간의 충돌은 사상최대 전차전투의 하나로 알려지게 된다.
이 전투는 쿠르스크 돌출부 의 소련군을 포위하는 독일군의 성패를 가를 중요한 전투였다.
이 전투의 결과는 주장하기 나름이다. 독일은 전략목표를 얻는데 실패하지만 몇몇 전술적 교전에서 승리한다. 소련 또한 일련의 방어교전에서 승리하고 독일군이 방어선을 뚫는 걸 막아내지만 소련군의 공격은 격퇴된다. 전투가 끝날 때까지 양측은 큰 손실을 입는다. 무장친위대 사단은 무력화된다. 소련의 손실은 훨씬 컸지만 작전/전략 상 예비인력과 자원이 커서 전략적/작전적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이 전투의 결과, 동부전선에서 독일군이 승리할 가능성은 사라졌다. 독일군은 남은 전쟁 기간 내내 전략적 수세에 몰렸다.
배경
1942-43 년 겨울 독일 제6군이 스탈린그라드 전투 에서 손실됐다. 이어서 소련이 벌인 우라누스 작전, 겨울폭풍 작전, 작은 토성 작전 은 독일군 남부집단군 을 위협한다. 이들 소련 작전이 성공한다면 남부집단군 전체를 괴멸시킬 것이었다. 이들 작전으로 카프카스의 대부분이 겨우 7만명의 전사자만 내고 해방됐다.
더 많은 성공에 목마른 스탈린은 로스토프나도누를 지나 맹타를 가해 독일 남부군 을 포위하라고 명령한다. 붉은군대는 진격하지만 지나치게 늘어졌다. 에리히 폰 만슈타인 은 이를 알아채고 서둘러 되받아쳐 3차 하르코프 전투 가 일어난다. 2차 하르코프 전투 와 마찬가지로 기동성 있는 독일군이 소련군 선봉의 측면을 협공, 격파한다. 이 승리로 1943년 3월 14일 독일국방군과 무장친위대는 하르코프를 되찾고 소련군을 돈 강 북쪽으로 후퇴시킨다. 이 과정에서 북쪽에서 남쪽으로 150 마일 가량의 돌출부를 만들어 소련군 방어선을 밀어부친다. 독일은 약 9,000 명의 포로를 얻고 23,000 명의 소련군 전사자 를 헤아린다. 소련 기록에는 45,000 명이 죽고 잡힌 것으로 나온다.
독일군이 쿠르스크 남쪽 벨고로드도 되찾지만 쿠르스크는 아직 소련 수중 에 있었다. 하르코프를 지난 독일의 진격은 소련의 저항이 거세어지자 곧 느려지고 결국 저지된다. 양군 모두 공세를 이어갈 힘이 없어 쿠르스크 돌출부 가 생긴다. 아돌프 히틀러 와 독일최고사령부는 상대적으로 좁은 쿠르스크 지구 를 다음 주요 공세 목표로 삼아 소련의 작전/전략적 예비병력을 괴멸시키려 한다. 이것으로 동부전선 의 균형을 되찾고, 전략적 주도권도 다시 거머질 것이었다.
소련 정보기관은 쿠르스크 돌출부 가 이해 여름 주요 독일군 공세의 촛점이 되리란 걸 알아챈다. 쿠르스크에서 소련군의 전략적 방어는 1941년 모스크바와 달리 전 전선에서 일어날 것이 아니었다. 이 덕에 100km에 달하는 깊이로 강한 종심방어를 펼칠 수 있었다. 소련은 40개 제병연합군과 5개 전차군을 포함하는 10개 방면군을 600-700km 깊이로 약 2,000km에 걸쳐 전개했다. (여러가지 병과를 함께 운영하는) 제병연합부대가 지키는 겹겹의 중무장 강화진지 라인에 독일군을 몰아넣어 소모시킬 방어전략을 스탑카가 승인한다. 독일의 공세가 움추려들면 소련 기갑 예비전력을 쏟아붓는 반격을 가해 이제 약해진 독일군 을 깨부술 것이었다.
양군의 전력
독일
프로호로프카에 참전한 독일군은 주로 3개 무장친위대 사단이다. 이들 모두 앞선 전투에서 손실을 입은 상태다. 제1 SS 아돌프히틀러, 제2 SS 다스라이히, 제3 해골Totenkopf사단 은 애초에 전차 456 량과 돌격포 137 량으로 쿠르스크 공세 를 시작했었는데 티거는 35 량뿐이었다.
다른 설
"10기갑여단은 51, 52전차대대로 구성되어 GD사단에 배속되었던 판터 여단입니다. 저기서 언급한 티거 는 GD사단 전차연대3대대겠죠. (실제로는 10기갑여단 소속도 아닙니다.) 그런데 GD전차연대 3대대는 1943년 6월 29일에 첫 3대를 수령했고, 나머지 중대들은 7월 초에 타 중전차대대에서 중대 단위로 차출되던 참이었습니다. 쿠르스크 전투 시점에서 편성이되다말다 정신없었죠.
결국 대대로서의 전투 참가는 7월 말부터였고, 쿠르스크 전투에 참가한 건 실질적으로 원래 GD사단티거중대였던 GD전차연대 13중대 티거 14대가 전부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7월 12일에 다른 곳에 있음이 중대 기록으로확인됩니다. 48기갑군단이 쿠르스크 전투에 투입한 티거 는 그 1개 중대가 전부였습니다." -- 윤민혁님의 글
티거 중전차. 중장갑과 강력한 88미리포는 T-34에게 큰 위협이 되었다.
그러나 티거 와 판터 등 신형 전차 생산으로 4호 전차 등 전체 전차 생산량이 주춤해져
당시 급증하던 소련군 전차 생산량을 따라잡지 못한 걸 패인 중 하나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티거 와 판터 등 신형 전차 생산으로 4호 전차 등 전체 전차 생산량이 주춤해져
당시 급증하던 소련군 전차 생산량을 따라잡지 못한 걸 패인 중 하나로 보기도 한다.
추가로 1개 여단이 더 투입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제10 기갑여단 은 1943년 6월 23일에 창설돼 45 량의 티거를 보유했다. 이 부대가 교전했는지 알려져 있지 않다. 이 부대가 제2 SS다스라이히 기갑사단 에 합류, 티거 전력을 70 량으로 늘렸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독일은 7월 11일 70 량의 티거를 비롯, 전차와 돌격포를 아울러 약 400 량이 이용 가능했다.
판터 중형전차. 쿠르스크의 데뷔 무대에서 기계적 고장이 빈발, 기대에 못 미쳤다.
프로호로프카 투입 여부는 불명.
프로호로프카 투입 여부는 불명.
소련 측 주장으론 독일이 500-700량의 전차를 전개했다. 7월 12일에 복귀 전차 전력에 대한 독일 기록은 완전치 않다. 남은 독일 기록에, 7월 11일 제1, 2, 3 SS 기갑사단의 가용 전차는 각각 77량, 95량, 122량으로 도합 294량이었다. 다음날 7월 12일 제1 기갑척탄병 사단의 가용 수량은 알려지지 않고, 나머지 두 사단은 복귀 전차 전력이 각각 103량과 121량이었다. 7월 13일 복귀 전력은 각각 70량, 107량, 74량이었다. 7월 14일은 각각 78량, 115량, 73량이었다. 7월 15일 85량, 99량, 77량으로 일반적 감소를 보였다. 마지막 기록인 7월 16일은 각각 96량, 103량, 96량의 전차가 작전 가능했다.
제2 SS 기갑군단 은 494 량의 전차로 쿠르크스 전투 에 나섰으나, 7월 12일까지 그 전력이 정확히 200량으로 떨어졌다. 독일 공군 전력은 제8 항공군단이었다. 1943년 7월 5일 전투 오더 (order of battle) 에 966기의 항공기가 있었다. 그전 주에 입은 손실은 미미했다. 7월 5-8일 사이 독일공군 병참감은 불과 41기의 손실을 보고했다. 7월 8-11 기간의 손실은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7월 5-31일 사이에 쿠르스크 돌출부 의 남쪽 방면에서 모두 약 220기를 잃었다는 것은 알려져 있다.
소련
소련 측의 주력은 제5 근위 기갑군 으로 약 800-859 량의 장갑차량을 장비했다. 그러나 그중 상당수가 T-70 경전차였다. T-34 중형전차 409량, T-70 경전차 188량, 영국서 원조 받은 처칠 보병전차 31량, SU-122와 SU-76등 자주포가 48량, 기타 소수의 KV-1 중전차였다. 일부 주장과 달리, SU-152나 SU-85 돌격포 는 투입되지 않았다. 소련 측 기록에 따르면, 이들 수치는 제2 기갑군단, 제2 근위 기갑군단이나 제1529 자주포연대를 포함하지 않았다.
T-34/76 중형전차. 당시 소련 기갑 부대의 주력. 티거의 측면을 노려야 했다.
붉은군대는 소련 제2 근위기갑군단 과 제29 기갑군단, 제18 기갑군단 을 앞에 배치했다. 제5 기계화군단 과 이미 약해진 제2 기갑군단 은 예비로 돌렸다. 제18 기갑군단 은 144 량의 전차를 7월11일 오후 투입하고 제 29 기갑군단 은 212 량의 전차와 자주포를 전개했다. 그날 하루동안 함께 대형을 이뤄 전투를 치룬 소련 전차들은 500 량에 이를 것이다.
소련 KV-1 중전차. 소수만 투입됐다. 무장은 T-34/76보다 나을 게 없었다.
소련 제1기갑군 은 독일 제48 기갑군단 도 공격하지만 프로호로프카 전투 와 직접 관련된 것은 아니었다. 요약하면 독일 294 량, 소련 616 량의 장갑차량이 또는 최대한 크게 잡아서 독일 429 량, 소련 870 량이 프로호로프카 전투 에 투입됐다.
투입된 48량의 자주포 중의 하나인 SU-122 자주포
소련 항공병령은 1주일간 집중 운용되었다. 붉은공군의 제2 항공군 은 그전 주의 쓰라린 손실에도 472 기의 작전기를 헤아릴 수 있었다. 이 가운데 266 기는 전투기, 160 기는 폭격기였으며 90 기는 일류신 IL-2 슈트르모빅 이었다. 제17 항공군도 투입됐다. 역시 높은 소모율에 시달렸으나 약 300 기의 작전기를 동원할 수 있었다.
북한군이 장비 한국전쟁에서도 활약한 Su-76 자주포
이처럼 양측의 공군력은 팽팽해서 현명한 운용이 필수였다.
전투 이전 상황
프로호로프카 전투 이전 독일군의 진격
새 장비가 전선에 다다르기를 며칠 기다린 뒤 독일의 공세가 1943년 7월 5일 비롯됐다. 독일군 상장 上將 (Generaloberst) 헤르만 호트 의 독일 제4 기갑군 은 SS기갑군단을 선봉으로 싸웠다. 정교한 팩프론트(독일군의 대전차방어 진지. 소련도 곧 카피해 써먹는다) 대전차 구역에 배치된 고밀도의 지뢰밭, 참호 속 보병, 대전차포로 이루어진 10-15 마일의 소련 방어망을 뚫어야했다. 독일군 공격은 35 킬로미터 깊이의 3번째 방어망까지 침투하지만 결국 소련 제 1 기갑군 에 저지된다.
7월 5-11일 동안 독일 제2 SS기갑군단 은 소련 제1기갑군 과 제68군 사이에 쐐기를 박는데 근접한다. 전투는 어려웠지만 독 제4기갑군 은 소련의 주 방어 구역을 그럭저럭 돌파한다. 7월 5일 이후 1,000 량의 소련 전차를 격파했다고 독일은 주장했다. 독 제48 기갑군단 단독으로 1,300 명의 소련 병사를 죽이고, 7,000 명을 포로로 잡았다 한다. 독 제48 기갑군단 은 또한 170 량의 소련 전차, 180 량의 중박격포를, 대전차포, 야포와 함께 격파 또는 노획했다 주장한다.
독일 제2 SS기갑군단 은 프로호로프카의 소련 방어선의 제3 라인을 돌파한다. 독일군은 돌파에 성공했다고 오판하고, 다음날 전과확대를 노렸다. 그들은 소련의 마지막 예비 병력까지 이겼다고 생각했다. 독일군은 몰랐지만 이반 코네프 의 스텝 방면군(훗날 제2 우크라이나 방면군) 이 예비병력으로서 반격을 노리고 있었다. 7월 11까지의 독일군의 성공에 따라 코네프 의 항의에도 불구, 스탑카가 2개 군, 즉 파벨 로트미스트로프 휘하의 제5 근위 기갑군 과 스텝 방면군에서 온 제5 근위군 을 독일의 위협에 같이 맞서도록 투입하는 것을 주코프가 승인한다.소 제42 근위 라이플 사단 은 즉시 투입된다. 급박한 행군 끝에 이들 부대는 프로호로프카에 7월 11일 밤 도달한다. 소련 방면군들은 이제 반격 준비가 완료된 것이다.
독일의 공세 계획
프로호로프카에서 독일의 계획은 치타델작전의 일반적 작전 계획을 따랐다. 소련 방어선 남쪽을 뚫어 쿠르스크에서 북쪽의 협공과 연결하는 것이다. 이 공격은 남서쪽으로 프셀 강까지 공격하기 위해서 제48기갑군단과 동시에 수행해야 했다. 프로호로프카 기차역 은 주된 전술 목표였다. 희망한대로 기차역을 점령한다면 이 구역에서 독일 제4기갑군 의 돌파가 가능할 것이었다. 이것으로 소련 후방 깊숙한 작전/전술적 돌파와 쿠르스크 안팎의 소련군 포위가 가능해진다.
소련의 반격 계획
쿠르스크전투는 7월 11일, 12일 큰 갈림길에 선다. 독일 제2 SS기갑군단 의 침투는 프로호로프카기차역까지 뚫는데 성공하고 소련 제1 기갑군 을 곧 포위하게 되었다. 그 기차역은 보로네슈 방면군 방어망의 중심이었다. 7월 11일 주코프 원수 는 소련 5개군에게 반격을 명한다. 그 중 스텝 방면군 소속 2개군은 12일에 독일 선봉에 반격을 시작할 것이었다.
진격해 들어온 독일군을 공격하여 그들의 침투선을 절단하고, 함정에 몰아넣어 괴멸시키기 위해, 이들 소련군 5개 군은 미하일 카투코프 소장 의 소련 제1 기갑군 과 협동으로 공격하기로 했다. 다른 3개 군이 독 제48 기갑군단 과 독 제52 군단 을 공격하는 동안, 소련 제5 근위 기갑군 은 SS기갑군단을 목표로 했다.
제5 근위 기갑군 의 공격안은 큰 결점이 있었다. 즉 적절한 포병 지원이 없는데다 소련 전차의 장갑과 화력의 부족을 고속 돌파로 메우고자 했다. 또한 독일군을 어느 정도 막아냈던 (그전에 소련군이 파낸) 대전차 방어용 도랑이 있는 구역으로 주 공격을 가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소련 항공 전력 대부분은 남부 지구의 북쪽 측면에 집중돼 프로호로프카 상공의 제공권은 완전히 독일공군에 넘어가버렸다. 문제가 더욱 꼬인 것은 소련의 공중-지상 간 통신 시스템이 잘 동작하지 않아 전투 개시 몇시간 동안 독일 공군에게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전투

프로호로프카 전투 상황도
갈색: 소련군
7월 12일 06시 50분 시 독 제2 SS 기갑군단 은 공격에 나선다. 소련군 역시 공격 기동을 개시한다. 양측 항공기들이 각각의 지원 지점에 도착, 대규모 공중전이 벌어진다. 독 제2 SS기갑군단 의 보고는 "07시 10분 적 공군 활동 강력..."이다. 쿠르스크 전투 초기 남부 지구에 대해 소련공군이 독일보다 더 많이 출격했다. 소 제17, 제2 항공군 은 893번의 항공 임무에 나선 반면, 독 제8 항공군단 은 약 654번의 소티를 기록했다. 독 제8 항공군단의 한스 제데만 이 지휘한 독일공군은 독 제2 SS기갑군단 의 진격을 엄호하는 데 집중했다. 더 북쪽에 대한 독 제48 항공군단 의 지원은 독 제3 전투항공단 과 독 제52 전투항공단 의 산발 지원에 그쳤다. 소련과 독일 지상군 각각의 공격의 성공에 공중전은 결정적이었다. 적절한 항공지원 없이 소련군의 공습에 직면한 독 제48 기갑군단 은 수세에 몰렸다. 독 제11기갑사단 은 "독일 공군이 가끔 출격하지만 소련 공군이 더욱 많고 급강하 폭격도 있다."고 기록했다.
티거 는 35량에서 70량이 참전했다.
소련의 날으는 전차, IL-2 공격기
더 몰아치기 위해 소 제10 기갑군단 과 소 제1 전차군 은 독 제48 기갑군단을 공격했다. 그러나 이때 독일공군도 반격으로 지상공격에 나섰다. 독일 하인켈 He111 폭격기 는 소 제69군 과 소 제5 근위 기갑군에 큰 손실을 입혔다. 이런 점이 양측 공군 전투기 세력의 약점이었는데 격추 당한 폭격기가 없었다. 독일공군의 엄호 부족으로 독 제48 기갑군단 도 공세를 멈춰야 했다.
아무런 우회 공격 지원도 없이 독 제2 SS기갑군단 은 소 제5 근위 기갑군 에 대해 홀로 돌격을 감행했다. 소 제5 근위 기갑군 과 독 제2 SS기갑군단은 동시에 공격에 나섰다. 독일 계획은 해골 (Totenkopf) 사단 이 프셀 강 북쪽에서 돌격해, 그전에 확보한 교두보를 넓히는 것이었다. 다스 라이히 사단 과 아돌프 히틀러 사단(LSSAH) 은 이 돌격에 투입되지 않고 해골 사단이 승리할 때까지 방어 임무를 맡기로 했다.
09 시 15분 소련이 공격에 나섰다. 로트미스트로프 중장 이 약 430 량의 전차와 돌격포를 선봉으로 다른 70 량을 제2 파로 던져넣었다. 이 공격은 재앙이었다. 독일공군이 즉각 공중지원에 나서 융커스 Ju87 슈투카 급강하 폭격기, 포케불프 Fw 190 전투폭격기, BK37 37mm포 장착 헨셸 Hs 129 전차 공격기 등이 소련군 기갑 부대 대열 위로 나타났다. 소련 전차대는 숨을 곳도 없이 얻어맞았다. 독일 포병과 전차도 지원 사격을 가해, 로트미스트로프 의 공격은 좌절됐다. 싸움터는 불타는 소련 전차들의 짙은 연기로 가득하여 양측 모두 앞을 보기 어려웠다. 정상적으로, 37미리 포는 소련 전차를 잡기에 모자라지만, 소련군은 처음에 가벼운 저항만 내다보고, 차체 후방의 금속제 보조 연료 탱크를 남겨두는 바람에 피해가 컸다. (역주: 공중에서 장갑이 약한 전차 상면이나, 후면, 측면 등을 37mm포로 때린다면 충분히 가능할 듯합니다. 소련의 IL-2는 더 소구경의 20mm기관포로도 독일전차를 잡았지요)
소 제29 전차 군단 소속 제32 전차 여단의 보고는 "적 포병과 공습으로 아군 전차대가 중대한 손실을 입었다. 10시 30분 아군 전차는 콤소몰레츠 집단 농장에 도달했으나, 공습이 이어져, 더 이상 진격이 불가능, 방어로 돌아섰다"였다. 모두 합쳐, 소 제5 근위 전차군, 소 제18 전차군단, 소 제29 전차군단은 원래 보유했던 800량의 전차 중 약 400량의 전차를 아침 공격에서 잃었다.
독일 Hs 129. 소련 지상군 부대 공격에 활약했다.
실패의 원인 중 하나는 소련군이 효과적인 대지 공격 체계를 갖추지 못 했다는 것이다. 소련의 공중 공격 부대는 적의 갑작스런 이동에 재빨리 반응할 수 없었다. 게다가 소 제2, 제17 항공군은 독일 제48 기갑군단 위에 집중하여, 결국 독일 공군이 노출된 소련 기갑군에 방해 받지 않고 접근할 수 있었다. 소 제31 전차군단 사령관의 보고는 "13:00시까지 아군의 공중 엄호가 전혀 없었다"였다. 소 제5 근위 기갑군의 불평은 "적기는 우리 전투 대형을 전투 내내 낚아챈 반면, 아군 기는 특히 전투기들은 완전히 불충분했다"였다.
오후 전투
소 제5 근위 기갑군의 예비 병력은 남쪽으로 투입돼, 독 제3 기갑군단의 공격을 막아야 했다. 이들 예비 병력이 빠져나가자, 이제 SS 기갑군단에 공세를 가해 대패를 수습할 모든 희망이 끝장났다. 그러나 독일의 진격도 실패한다. 무서운 손실을 입었지만, 소련군은 방어선을 지켜내고 제2 SS 기갑군단의 돌파를 막아냈다. 소련이 아침 전투의 교훈을 되살려, 대대분의 전차전은 상당히 가까운 거리에서 일어났다. 인명 손실은 대략 소련군 5,500명, 독일 SS 850명이었다. 전차 손실은 논란이 있지만, 소련군은 약 300량, 독일 SS는 약 70에서 80량의 장갑차량 손실이, 독일의 공세 중에 일어났다.
결과
양측의 정확한 손실은 자세하게 알기 어렵지만, 결과는 분명하다. 이날 소련 제5 근위기갑군이나 독일 제2 SS 기갑군단 어느쪽도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다. 소련 제5 기갑군은 지형 상의 목표를 점령하지도, 독일 제2 SS 기갑군단을 격파하지도 못 했다. 두 부대 모두 다음날도 전투에 투입되지만, 약화되었다. 소련군이 실패한 공격에 수백 량의 전차를 던져 넣을 게 아니라, 참호에 박아넣고 독일군 전력을 소모시켰어야 했다. 코네프는 제5 근위 기갑군을 이런 식(참호에 전차를 박아넣는 식)으로 쓰는 데 매우 비판적이었다. 공세를 통해 전과를 확대할 기회를 앗아간다 본 탓이다.
다른 측면으로, 강력한 소련 예비 병력이 급작스럽고 격렬한 공격을 가해오고, 쿠르스크 돌출부 북쪽 모퉁이에 대한 독일 제9군의 돌격이 소련군의 쿠투조프 작전에 따라 중지해야 할 필요가 생긴 것이, 히틀러가 공격 중단을 결정하는 데 한몫했다. 이것이 암시하는 것을 히틀러가 처음 따져보자 속이 불편해졌다. 당초 쿠르스크 남쪽 모퉁이에서 전과 확장 목적으로 독일 예비 전력을 배치했었다. 그러나 하르코프 남부 미우스 Mius 강의 독일 제 6군을 붉은 군대가 동시에 공격하는 바람에 이 예비 병력을 철수시켜야 했다. 또한, 독일 국방군 최고 사령부(OKW)는 동부전선에 일부 병력을 차출해야 했는데, 1943년 7월 10일 영미 연합군이 시칠리아를 침공하여 지중해 전선을 강화할 필요가 생겼기 때문이다.
실제 전술상의 결과에 상관없이, 프로호로프카 전투는 대단한 선전물과 붉은 군대의 작전적 승리가 되었다. 독일은 처음에 소련인들이 거의 수비에 치중하고 소수의 대전차포 밖에 없으리라 내다봤다. 그러나 그들이 만난 건 1,000량에 가까운 전차였다. 명백히, 소련이 패배한 건 아니어서, 독일의 결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독일의 장교와 병사들의 질적 우위가 이제 깎여나간 반면, 자신감이 넘치는 소련이 더 큰 반격을 가해 독일군을 독일 본토로 몰아 넣을 것이라는 게 분명해졌다. 이 시점부터 전략적 주도권은 붉은 군대의 손을 벗어나지 않았다.
독일군 프로호로프카 참패설
(http://warandgame.wordpress.com/2008/08/08/kursk-battle-of-prokhorovka-differing-views/를 번역)
썩 믿기는 자료는 아닙니다만 -_-; 제가 본 2차 대전에 대한 국내 서적의 내용도 이와 비슷한 거 같습니다만...
프로호로프카 전투는 2차 대전 중 동부전선에 벌어진 수많은 전투중 가장 이름난 전투의 하나다. 많은 서적과 TV 다큐멘터리에서 다뤄지지만, 기록의 정확성은 서로 다르다. 일부는 불충분하고, 다른 일부 기록은 픽션에 가깝다.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기록은 이렇다.
3개의 독일 무장 친위대 사단이 프로호로프카 를 협공하여 프셀 강과 철로 사이의 지형으로 쇄도했다. 수십 량의 장포신 75미리포 탑재 5호 전차 판터 와 가공할 88미리포 탑재 6호 전차 티거 를 포함한 500-700량의 독일 전차들이 굉음을 내며 전진하고 있었다. 이때 날렵한 T-34 중형 전차 수백량이 독일 SS 기갑 대열 한가운데로 파고 들어 독일군을 혼란에 빠뜨렸다. 소련군은 독일군 전차에 근접하여, 티거 의 88미리포를 무력화시키며, 독일 전차들을 기동성에서 압도하며 수백 량의 독일 전차를 격파했다. 소련 전차 부대의 대담한 전술로 독일군은 대참패, 붕괴된 SS 사단들은 도주, 400량의 파괴된 전차들이 나뒹굴었다. 이들 파괴된 전차 중에는 70-100량의 티거 와 판터도 포함된다. 이러한 대 손실로 SS 사단의 전력은 산산조각, 그 결과, 호트 의 제4 기갑군은 남쪽에서 부분적인 승리를 거둘 기회마저 날려버렸다.
민첩한 T-34에 맥없이(?) 당하는 티거
자료
- Bellamy, Chris. Absolute War; Soviet Russia in the Second World War. Pan Books. (2007). ISBN 978-0-330-48808-2
- Bergström, Christer (2007). Kursk - The Air Battle: July 1943. Chervron/Ian Allen. ISBN 978-1-903223-88-8.
- Cross, Robin. Citadel: The Battle of Kursk, Barnes & Noble Edition. (1998).ISBN 978-1-566195-81-2
- Dunn, Walter (1997). Kursk: Hitler's Gamble, 1943. Greenwood Press Ltd. ISBN 978-0-275957-33-9.
- Glantz, David M. & House, Jonathon. When Titans Clashed; How the Red Army Stopped Hitler. University of Kansas Press. (1995). ISBN 978-0700608990-7
- Glantz, David M. Soviet Military Operational Art; Pursuit of Deep Battle. Frank Cass. (1991). ISBN 0-7146 4077 8
- Healy, Mark. (1992). Kursk 1943: Tide Turns in the East. Osprey Publishers, London. ISBN 978-1-85532-211-0
- Over, Richard. Russia's War.Pengiun Books. (1997). ISBN 0-14-027169-4
- Zetterling, Niklas and Anders Frankson. Kursk 1943: A Statistical Analysis, London: Frank Cass, (2000). ISBN 0-7146-5052-8
번역 자료:
- http://en.wikipedia.org/wiki/Battle_of_Prokhorovka
- http://warandgame.wordpress.com/2008/08/08/kursk-battle-of-prokhorovka-differing-vi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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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상장→상급대장?
슈트카→슈투카?
"판문점 대표부 대표인 리찬복 북한인민군 상장과 외무성의 리영호 대미 관계 담당 부상..."
Stuka는 슈투카가 맞지요.
카프카스가 현지 발음에 가깝겠네요.
즉 소련 장군 계급을 굳이 우리말로 1:1 대응번역하려 한다면 소장-중장-상장-원수-연방원수가 됩니다. 요즘은 소-중-대-차수-원수로 번역하더군요.
이렇게 번역하는군요. 저 역시 감사합니다.
사실 소련군의 연방원수도 보통 타국 원수보다 높은 계급이라 저렇게 번역하는 것도 문제가 있죠. 좀 더 고민해 봐야 할 문제입니다 사실은.
결국 대대로서의 전투 참가는 7월 말부터였고, 쿠르스크전투에 참가한 건 실질적으로 원래 GD사단 티거중대였던 GD전차연대 13중대 티거 14대가 전부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7월 12일에 다른 곳에 있음이 중대 기록으로 확인됩니다. 48기갑군단이 쿠르스크 전투에 투입한 티거는 그 1개 중대가 전부였습니다.
이 기록도 티거 14대 설을 뒷받침하네요.
보충해서 넣어야겠습니다.
<----이 글은 대조국전쟁에 나오는 글이군요 ^^